평량(平亮)의 처(생몰년 미상)는 소감(少監) 왕원지(王元之)의 집 여종이었으며, 평량은 평장사 김영관(金永寬)의 노비였다. 평량은 견주(見州·현 경기도 양주)에 살면서 농사에 힘써 부자가 되었다. 고려시대에 노비는 주인과 함께 사는 솔거(率居)노비, 따로 거주하는 외거노비로 나뉜다. 외거노비는 소작인 비슷한 존재였다. 즉 주인 소유의 토지를 경작하고 수확량의 일부를 주인에게 바치고 나머지로 생계를 유지하였다.
이들은 여력이 있으면 다른 사람의 토지를 더 소작하거나 품팔이 등을 통해 소득을 높일 수 있었다. 평량 부부도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일해 재산을 모았던 것으로 보인다.
부자가 된 평량은 권력자에게 뇌물을 주어 양인(良人)이 되고, 나아가 산원(散員) 동정(同正)의 벼슬까지 얻었다. 어느 때 평량의 처의 주인인 왕원지가 가난해 살기가 어려워지자 가족을 데리고 그녀에게 와 의탁하였다. 평량은 후하게 대우하면서 서울로 돌아가라고 권유하였다. 그리고 처남 인무(仁茂), 인비(仁庇) 등과 함께 도중에서 기다리다 그들 가족을 살해하였다.
평량은 이제 상전이 없어졌으니 모두 양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아들 예규(禮圭)에게는 대정(隊正) 벼슬을 얻어 주어 팔관보(八關寶) 판관(判官) 박유진(朴柔進)의 딸에게 장가보내고, 처남 인무는 명경(明經) 학유(學諭) 박우석(朴禹錫)의 딸과 혼인시켰다. 내막을 아는 사람들은 모두 통탄했는데, 어사대(御史臺)에서 이를 알고 체포하여 문초하였다. 평량은 먼 섬으로 귀양 가고, 박유진과 박우석은 파면됐다. 아들과 처남들은 모두 도망쳐 숨어 버렸다. 평량의 처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다.
‘고려사’에 실린 이 이야기는 평량을 주인공으로 서술하고 있지만, 평량의 처 역시 남편에게 동조했을 것이다. 이들이 이렇게 끔찍한 일을 저지른 것은 당시의 사회 분위기와도 관련이 있다. 사건이 일어난 1188년(명종 18)은 무신 집권기였다. 탄탄한 신분제도를 자랑하던 고려의 문벌 귀족사회는 1170년 무신정변이 발발하면서 크게 변하였다. 집안 좋던 문신들은 거의 다 죽임을 당했으며, 조정에는 천인(賤人)들이 넘쳐났다. 그중 대표적인 사람이 노비의 아들 이의민(李義旼)으로, 1188년은 바로 이의민이 집권하던 시기였다.
무신들의 집권은 수탈에 고통 받던 백성이나 천민들에게 새로운 시각을 준 것도 사실이다. 전국적으로 민란이 계속 일어났다. 조금 뒤의 시기이기는 하지만 만적(滿積)은 “장군과 재상의 종자가 어찌 따로 있겠는가? 때가 오면 누구나 할 수 있을 것이다”라며 노비 반란을 주동하기도 하였다.
고려시대에 노비는 생살여탈(生殺與奪)이 주인 손에 달려 있던 ‘살아 있는 재산’이었다. 그들의 꿈은 양인이 되는 거였고, 평량의 처는 신분제의 동요와 함께 그 꿈을 실현하려 하였다 하겠다.
공동기획: 이투데이, (사)역사 여성 미래,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