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보험금 사태부터 즉시연금 일괄구제 논란 모두 모두 약관의 해석에서 시작됐다. 금융당국은 소비자 보호를 들어 보험사의 보험금 지급 결정을 내려왔지만, 그 때마다 보험사들은 금융당국의 비현실적인 약관정책을 지적하고 있어 갈등의 골이 깊어져만 가는 상황이다.
삼성생명은 26일 이사회를 열고 즉시연금 가입자 5만5000명에게 '미지급금'으로 언급되는 4300억 원 중 일부를 지급하기로 했다. 사실상 부결이다.
이사회는 의결 문건에서 "이 사안은 법적 쟁점이 크고 지급할 근거가 명확하지 않아 이사회가 결정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났다"며 "법원 판단에 따라 지급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결정을 내렸다"고 밝혔다.
금융감독원의 즉시연금 미지급금 지급 결정은 삼성생명의 만기환급형 즉시연금 가입자가 낸 민원에서 시작됐다. 즉시연금은 보험 가입시 보험료 전액을 일시에 납부하고, 이를 바탕으로 매월 연금을 지급받는 상품이다. 보험 만기시에는 만기보험금을 돌려받는 상품과 그렇지 않은 상품이 있다.
문제가 된 만기환급형 즉시연금은 계약자 일시납부한 보험료에 일정 이율을 적용해 산출한 금액에서 만기 때 돌려받을 보험금 지급을 위한 재원을 공제한 금액을 매월 연금으로 받는다. 해당 가입자는 2012년 9월 만기환급형 즉시연금을 가입했는데 당시 약관에는 ‘연금지급시 만기보험금 지급재원을 공제한다’는 내용이 없었다.
이에 보험사들은 사업비 등을 차감한 뒤 계약자에게 돌려줄 보험금을 적립했다. 보험의 특성상 만기환급금은 보험료에 이율을 곱해 적립한 금액보다 적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약관에는 ‘사업비를 공제한다’는 문구가 없는 만큼 보험사로부터 보험금을 ‘덜 돌려받았다’고 판단한 가입자가 문제를 제기 한 것이다.
이번 즉시연금 미지급금 문제는 자살보험금 지급 사태와 닮아있다. 금감원은 2016년 생보사를 대상으로 ‘자살은 재해가 아니다’라는 이유로 보험금을 미지급한 생보사에게 보험금 지급을 명했다. 보험사들은 2000년 초반 자살을 재해로 인정해 재해사망금을 준다고 약관에 넣었지만 2010년에 이를 개정했다. 하지만, 금감원은 개정 전 가입자에게는 보험금을 지급해야 한다고 해석했다.
보험사들은 되풀이되는 ‘약관 논란’에 억울하다는 입장이다. 약관이 잘못된 것은 사실이지만, 고의가 아니라는 것이다. 또 약관 개정의 어려움과 부실한 약관제정 방식도 보험사에 불리하다고 주장한다. 생명보험 업계 관계자는 “지금 약관도 어렵고 전문적인데 정작 금감원은 약관을 쉽게 만들라고 지시했다”며 “약관을 간소화하면 (즉시연금 사태와 같은 사례가) 더 많이 일어날 수 있다”고 말했다.
또한 해당 관계자는 약관에 보험료 산출방식까지 다 기재할 경우 약관의 비대화가 불가피하고 세부 범위를 정하는 데도 상당한 어려움이 있다고 털어놨다. 약관으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문제를 예상할 수 없는 만큼 약관 해석에 여유를 줘야한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금융당국은 ‘약관을 심사한 책임을 회피한다’는 지적에도 보험사 책임이라는 기존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윤석헌 원장은 전날 국회 업무보고에서 “상품이 판 주체는 보험사”라며 “금감원에 책임이 없다고 말하기는 어려울지 모르지만 일차적 책임은 회사에 있다. 수 만가지 상품의 약관들을 금감원이 일일이 다 심사해서 적부를 판정할 인력이나 능력이 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