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경제가 고도성장을 하지 않거나 벤처기업의 혁신성이 발휘되지 않으면 과거처럼 토종기업이 대기업으로 성장하는 것은 구조적으로 어렵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이는 현 정부 국정철학의 한 축인 혁신성장과도 문제의식 면에서 맞닿아 있다.
경제개혁연구소가 29일 발표한 ‘한국 500대 기업의 동태적 변화 분석과 시사점(1998~2017)’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500대 기업의 매출은 국내총생산(GDP)의 118.1%에 달했다. 미국 500대 기업의 GDP 대비 매출액이 62.7% 수준인 점을 고려하면, 우리 경제에서 대기업의 영향력을 가늠할 수 있다. 우리 기업의 GDP 대비 매출액은 한때 141.4%까지 치솟기도 했다.
대기업 중에서도 상위 재벌에 경제력이 집중됐다. 500대 기업 중 5대 재벌 계열사는 2007년 79개(15.8%)에서 지난해 93개(18.6%)로 늘었고, 이들을 포함한 20대 재벌 계열사는 146개(29.2%)에서 182개(36.4%)로 증가했다. 같은 기간 500대 기업 매출액 중 5대 재벌 계열사의 비중은 33.9%에서 39.3%로, 20대 재벌 계열사의 비중은 51.9%에서 59.7%로 확대됐다.
500대 기업에 진입한 신설 회사 중에도 재벌 계열사가 눈에 띄었다. 지난해 500대 기업 중 2000년 이후 신설된 법인은 175개인데, 이 가운데 35.6%인 62곳은 30대 그룹 소속 계열사였다. 여기에 자산 5조 원 이상 대규모 기업집단 소속 회사인 28곳 등 112곳(64.4%)은 재벌, 금융그룹 및 공기업과 관계된 계열사였다. 이에 비해 비재벌 회사는 62개사(35.6%)에 그쳤다.
특히 기존 회사의 분할을 고려하면 실질적 신설 법인은 85곳인데, 이 중 재벌과 금융그룹 계열사가 47곳이고 비재벌계 회사는 38곳에 그쳤다. 심지어 비재벌계 회사 중에서도 합작사와 외국계 회사 14곳을 제외하면 국내 토종기업은 24곳뿐이다.
위평량 연구위원은 “한국 경제가 고도성장을 하지 않거나 벤처기업의 혁신성이 발휘되지 않으면 과거와 같이 혜성처럼 등장하는 대기업을 보기 어려운 토양”이라며 “2000년 이후 신설된 개별 대기업 중 비재벌 회사 비중이 크지 않다는 점에서 재벌 체제가 새로운 대기업 출현을 억제하고 있지는 않은지도 면밀하게 볼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다만 과거와 같은 고도성장이 단기적으로 어렵다는 점을 고려하면, 혁신성에 기반을 둔 벤처·중소기업 육성과 기업·산업 생태계 재편이 그나마 현실적인 대안으로 꼽힌다. 정부가 내년에 연구개발(R&D) 분야에 20조4000억 원, 산업·중소기업·에너지 분야에 18조6000억 원을 쏟아붓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들 분야에 대한 예산은 올해보다 3조 원 증액 편성됐다.
정부는 경제민주화도 지속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다. ‘갑질’로 표현되는 중소·협력업체에 대한 불공정거래 강요 관행을 개선해 재벌이 중소기업의 성장을 억제하는 구조를 개선하는 것이 큰 그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