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은 사우디아라비아의 저명 언론인 자말 카쇼기 살해는 계획적인 범행이었다고 주장했다. 이는 우발적인 몸싸움 중 사망했다는 사우디 정부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것이어서 주목된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23일(현지시간) 터키 의회에서 열린 ‘정의개발당(AKP)’ 의원 총회에서 “카쇼기 살해는 사전에 계획된 것”이라며 “강력한 증거가 있다”고 주장했다. 카쇼기가 총영사관을 방문하기 전날 총영사관에서 보낸 팀이 이스탄불 북부 벨그라드 숲과 보스포루스 해협 남동쪽 얄로바시를 사전 답사했다는 것이다. 계획은 카쇼기가 재혼을 위해 이혼 확인 서류를 떼러 처음 총영사관을 방문한 9월 28일부터 시작됐다고 한다.
에르도안이 카쇼기 살해 사건에 대해 입장을 나타낸 건 사우디 정부가 총영사관에서의 사망을 인정한 이후 처음이다. 다만 에르도안 대통령은 쟁점인 모하메드 빈살만 사우디 왕세자의 관여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사우디 정부의 언론 탄압 등을 비판해온 카쇼기는 2일 터키 최대 도시 이스탄불의 사우디 총영사관에서 살해됐다. 사우디는 당초 살해를 부정하는 등 설명을 계속 번복했다. 이에 에르도안 대통령은 “일부 치안·정보 요원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것만으로는 우리도, 국제사회도 납득할 수 없다”고 압박했다. 사우디가 사건에 연루돼 구속한 18명의 용의자에 대해 “이스탄불에서 재판받아야 한다”며 인도를 요구하기도 했다.
시신의 행방 등 쏟아지는 의문에 대답해야 하는 입장에 몰린 사우디는 23일 살만 국왕 주재 국무회의를 열고 “카쇼기 기자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자, 의무를 게을리 한 자는 누구든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서방 세계의 사우디에 대한 불신과 불만을 해결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22일 사우디로의 무기 수출 동결을 발표했다. 독일 정부는 다른 유럽연합(EU) 회원국에도 동참을 요구하고 있다. 캐나다 쥐스탱 트뤼도 총리도 이날 무기 금수 조치를 취할 의향이 있다고 분명히 했다.
처음에는 동맹국인 사우디의 설명에 이해를 표시하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도 22일 사우디 측의 설명에 “만족스럽지 않다”고 했다. 사우디를 옹호하는 입장은 여전하지만 지나 해스펠 미 중앙정보국(CIA) 국장을 터키에 파견, 수사 정보 공유를 요구하고 미국도 사실 관계를 직접 확인한 후 사태 수습에 적극 참여하려는 자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카쇼기 사건은 전대 미문의 사건으로, 향후 전모 해명을 위한 움직임에 따라서는 중동 정세의 불안정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모하메드 왕세자의 관여설이 해소되지 않으면 구심력 저하는 불가피, 사우디 왕실 내부의 권력 투쟁을 재연시킬 우려가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미국에서는 사우디와의 관계를 재검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여당인 공화당 내에서도 만만치 않다. 이스라엘과 함께 사우디와의 동맹 관계를 이란 봉쇄의 기축으로 삼는 미국의 전략이 흔들리면 지역의 힘의 균형에 변화를 초래할 수도 있다.
또 유가도 불안정해져 세계 경제에도 영향이 미칠 수 있다. 사우디는 카쇼기 사건을 둘러싸고 제재를 받게 되면 석유 수출 중단 등 대항한다는 방침이다. 이에 대해 나중에 칼리드 알 팔리 에너지 산업 광물 자원부 장관이 “그럴 의도 없다”고 정정했지만, 시장은 우려의 시선을 떨치지 않고 있다. 미국의 경제 제재로 이미 이란산 원유 수출이 줄어든 상황에서 공급 여력이 큰 사우디가 증산을 거부하면 유가 상승 압력이 커진다.
한편, 사우디에서는 '사막의 다보스'라 불리는 투자 콘퍼런스가 막을 올렸다. 그러나 대부분의 외국 기업 경영진이 카쇼기 기자 살해 문제로 참가를 취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