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 故 조양호 회장의 명복을 빌며

입력 2019-04-16 18:37 수정 2019-04-16 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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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호 산업부장

“열심히 했지만, 부도가 났다. 앞으로 좀 힘들어질 것 같다.”

아버지는 숨을 몰아쉬었다. 1988년 어느 날 저녁. 4남매를 불러 모은 그의 얼굴은 창백했다. 꿈을 잃은 기업인, 자식에게 번듯한 사업체를 물려주고 싶었던 가장, 최종 부도를 막아보겠다며 함께 동분서주했던 아내의 남편.

아버지의 얼굴은 황폐했다. 사업가의 당당했던 자존감은 배신, 부정, 불신으로 송두리째 무너졌다. 고급 로션 한 번 발라보지 못한 눈가의 주름골을 눈물이 채웠다. 공장을 다른 이에게 넘긴 아버지는 낙담을 이겨내려, 재기하려 최선을 다했지만 지병이 도져 일흔도 되기 전에 하늘나라로 떠났다.

어제 경기도 용인시 하갈동 신갈 선영에서 영면한 고(故)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을 보며 떠오른 아버지의 모습이다.

본인이 또는 그 가족들이 저지른 도덕적 일탈을 감싸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하지만 ‘대한민국 물류를 선도한 기업가로서의 충정과 진심이 왜곡되어 재단돼야 할까’라는 안타까움이 더 크다.

작년부터 대한항공 등 한진 계열사들은 모두 18번의 압수 수색을 당했다. 동원된 정부기관만 경찰, 공정거래위원회, 관세청 등 10여 곳이다. 조 회장 일가가 포토라인에 선 횟수가 14회였다.

어느덧 여론은 조 회장에게 노동자를 착취, 억압해 부를 쌓은 악덕재벌의 굴레를 씌웠다.

문재인 대통령은 대한항공 주주총회를 앞두고 “대기업 대주주의 중대한 탈법과 위법에 대해선 국민연금의 스튜어드십 코드를 적극 행사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미국에서 폐 질환 치료 중이던 조 회장은 결국 대표이사 자리에서 내려와야 했다. 대한항공의 한 임원은 울먹이며 부고를 전했다. 그리고 “대표이사 연임 실패가 조 회장의 건강을 급격히 악화시킨 것 같다”라고 설명했다.

조 회장은 1974년은 1차 오일쇼크가 한창인 때 대한항공에 처음 발을 들였다. 1978년부터 1980년에도 2차 오일쇼크가 대한항공을 엄습했다. 당시 연료비 부담으로 미국 최대 항공사였던 팬암과 유나이티드항공은 수천 명의 직원을 구조조정했다.

이런 숱한 위기 속에서도 지난 50년간 대한항공의 항공기는 8대에서 166대로, 국제노선도 일본 3개 도시에서 43개국 111개 도시로 늘었다. 국제선 여객 운항 횟수 154배, 연간 수송 여객 숫자 38배, 화물 수송량 538배 증가라는 성과도 있었다.

1969년 출범 당시와 올해 창립 50주년을 맞은 대한항공의 성적 비교다. 고 조중훈 한진그룹 창업 회장에 이어 한진그룹을 이끈 고 조양호 회장의 업적이기도 하다.

조 회장은 평소에 너무 바빠 다른 일에 신경 쓸 틈이 없다며 기껏해야 사진을 찍거나 무기 백과사전 정도 보는 걸 취미로 삼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45년간 쏟은 수송보국의 열정을 세상은 부정했다. 평창올림픽 유치와 개최를 위한 그의 애국심과 노력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검찰 조사과정에서 그의 지병은 변명으로 치부됐다.

조 회장은 지난해 이미 열패감(劣敗感)에 빠져들었을 것이다. 그 스트레스는 지병에 다시 치명타를 날렸을 터다.

톰 피터스와 로버트 워터먼이 쓴 책 ‘초우량 기업의 조건’에는 43개 기업이 등장한다. 하지만 이들 중 3분의 1은 책 출간 후 겨우 2년 정도 지났을 때 재정적 난관에 봉착했다고 한다.

50년 동안 지속성장한 그룹의 총수로서, 실질적인 경영자로서 조 회장의 업적은 객관적으로 인정받아야 하고 평가돼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정권의 반(反)기업적 정서가 조 회장을 죽음으로 몰아갔다고 보는 건 비약일 수 있다. 다만, 현 정권이 기업인들 평가에 인색한 것은 사실이다. 이들에게 들이대는 도덕적, 경영적 잣대는 엄격하다 못해 날 선 ‘작두’ 수준이다.

대한민국에서 기업인, 사업가로 태어나 산다는 것은 참 쉽지 않다. 특히 그룹 총수들은 일본 하이쿠 시인 고바야시 잇사(小林一茶)의 표현처럼 ‘지옥의 지붕 위를 걸으며 꽃구경을 하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최소한 기업인들의 공과를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사회적 여건이 조성되길 바랄 뿐이다.vicman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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