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와 스마트폰으로 상징되는 삼성의 고민 역시 이 두 개의 국가 현안과 궤를 같이하고 있다는 점에서 ‘대한민국=삼성’이란 등식을 붙일 수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10일 충남 아산시 삼성디스플레이 공장에서 열린 ‘신규 투자 및 상생협력 협약식’에 참석해 이재용 부회장을 격려하면서 삼성의 역할에 ‘우리들의 삼성’이라며 큰 기대감을 표명한 것이 바로 그 상징이다. 이 방문이 문 대통령의 11번째 전국경제투어 본행사인 충남도의 ‘충남 해양 신산업 발전 전략 보고회’에 앞서 이뤄졌다는 점도 주목됐다.
문 대통령은 4월 삼성전자 반도체 화성공장을 방문했고, 지난해 7월엔 인도 노이다 삼성 스마트폰 공장 준공식에 참석한 바 있다. 이번이 삼성 사업장의 세 번째 방문으로서 문 대통령은 삼성전자의 핵심 사업인 스마트폰·반도체·디스플레이 부문을 모두 둘러본 셈이 됐다. 문 대통령이 공식 행사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만난 것은 아홉 번째다.
이러한 문 대통령의 적극적 동선에 대응해 이 부회장의 의미 있는 행보도 이어지고 있다. 일본 정부가 불화수소 등 반도체 제조 관련 소재의 수출관리 강화를 발표한 7월, 이 부회장은 곧바로 일본을 방문해 일본 재계 관계자와 금융기관을 찾았다.
9월 20일에는 도쿄에서 열린 럭비 월드컵(W배) 개막식에 참가했다. 이 대회 조직위원회 회장인 미타라이 후지오(御手洗富士夫) 캐논 회장(전 경단련 회장)이 이 부회장을 초대한 것으로 전해졌다. 일본은 럭비를 야구와 함께 개회기 이후 일본이 아시아에서 서구로 나아가는 이른바 탈아입구(脫亞入歐)의 상징적인 스포츠로 여겨왔다.내년 올림픽만큼이나 국민적 관심을 끌고 있는 이벤트다.
또한 이달 4일 저녁, 삼성의 영빈관인 서울 한남동 승지원에서 ‘LJF 모임’을 했다. 이 모임은 1992년 이건희 회장의 지시로 만들어진 일본 전자부품 및 소재 관련기업 대표들과의 만남이다.
LJF는 이건희 회장의 성을 딴 ‘Lee’s Japan Friends’를 줄인 말이다. 모임에는 무라타(村田)제작소, 오무론, 미네베아, 롬, TDK, 교(京)세라, 호야 등 9개 기업이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참여 CEO는 무라타제작소를 빼고는 여러 차례 바뀌었다.
이 모임이 기반이 되어 삼성은 부품을 원활히 또 우선적으로 공급받게 되었고, 일본 기업들과 인적 커넥션를 갖추고 상호 생산계획을 조율하면서 시황에 맞는 ‘QCDS’의 성과를 크게 냈다고 한다. QCDS는 품질(Quality), 가격(Cost), 납기(Delivery), 대응 및 서포트(Service)를 말한다.
삼성도 큰 덕을 봤지만, 일본 기업들도 삼성에 최첨단, 최신기술 제품을 공급하면서 제품을 안정화시키고 세계화 전략을 성공적으로 추진할 수 있었다. 삼성과 일본 부품업체들이 일의대수(一衣帶水) 관계를 유지해 온 비결이다.
이 기업들은 전자 소재·부품에서 독보적 지위를 가진 소위 히든 챔피언으로 미국, 중국 기업들과도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최근에는 제4차 산업혁명의 주역 기술인 5G(차세대 통신기술), IoT(사물인터넷), AI(인공지능) 등에도 선도적 투자를 하며 성장하고 있다. 삼성은 이 기업들과 글로벌 서플라이 체인(공급사슬)과 글로벌 밸류 체인(가치사슬)을 공유하고 있다.
이런 삼성에 지금 탈(脫)일본, 극(克)일본의 과제가 맡겨진 것이다. 삼성은 아이러니와 딜레마가 함께하는 이 상황을 오히려 기회로 삼아야 한다. 경쟁과 협력으로 동반성장해 온 오래된 역사가 ‘증거 기반의 전략’이 될 수 있다. 삼성은 자세를 가다듬고 소재·부품·장비에서 제4차 산업혁명까지를 아우르는 대담한 포석과 행마를 펼쳐야 할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