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30년간 미국 민주당 대통령 후보들은 부(富)의 재분배를 거론하면서도 대체로 자본주의 기본 구조는 그대로 유지하는 공약을 내걸었다. 그러나 내년 민주당 대선 후보 선두그룹에 들어온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은 기존 자본주의 형식을 완전히 파괴하는 ‘리셋’을 시도하고 있어 그의 실험이 실현될지 주목된다.
2004년 대선 당시 민주당 후보였던 존 케리는 기업들의 일자리 아웃소싱을 비판했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은 글로벌 금융위기를 초래한 것은 바로 기업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워런의 비판은 이들을 능가한다. 그는 임금인상 정체와 학자금 대출 부담, 지구 온난화와 총기 폭력, 높은 의료비에서 저렴한 주택 공급 부족에 이르기까지 모든 문제에 대해 기업을 비판하면서 비즈니스 모델에 대한 전반적인 변혁을 꾀하고 있다.
워런은 부유층과 기업들에 대한 최소 6조 달러(약 6959조 원) 이상의 증세 이외에도 미국 자본주의를 뒤흔들 만한 여러 정책을 제안하고 있다. 그가 기업들을 대상으로 규제를 가하려는 부문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광범위하다.
애플과 페이스북, 아마존닷컴 등 IT 대기업들에 대해 워런은 독점적 시장 지배력을 문제 삼으면서 해체하거나 규제를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워런의 공약 중 하나는 아마존의 온라인 장터나 구글 검색엔진 등을 따로 분사시켜 이른바 ‘플랫폼 공익사업자’로 지정하겠다는 것이다.
대형 은행에 대해서도 분사를 추구하며 셰일유와 가스 생산에 필수적인 ‘수압파쇄’ 공법을 환경보호를 이유로 금지할 방침이다. 또 향후 8~15년에 걸쳐 빌딩과 자동차, 발전소의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단계적으로 줄여 제로(0)로 만들겠다는 급진적인 환경정책도 내걸고 있다.
전 국민 의료보험을 실시하면서 민간 의료보험은 금지하며 대학의 영리 운영도 사실상 금지한다. 대기업에는 이사회 구성원의 최소 40%를 근로자 대표로 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의약품 가격 인하를 위해 제약업체와 협상한다는 것도 공약으로 내걸었다.
WSJ는 증세를 제외하더라도 워런의 공약에 직접 영향을 받는 기업들의 매출이 총 5조 달러에 이르고 이들의 시가총액은 8조 달러가 넘는다고 분석했다. 뉴욕증시 S&P500 기업의 3분의 1이 해당된다.
민주당의 다른 대선 후보인 버니 샌더스가 자신을 ‘민주 사회주의자’라고 부르는 것과 달리 워런은 자신이 ‘뼛속까지 자본주의자’라고 주장한다. 그는 지난해 CNBC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나는 시장이 이룰 수 있는 것을 사랑한다”며 “이는 우리를 더욱 풍족하게 하고 기회를 창출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오직 공정하고 규칙이 있는 시장만이 이를 가능케 한다”며 “규제가 없는 시장은 부자만이 모든 것을 가져가게 한다. 이것이 바로 미국이 빠진 문제”라고 지적했다.
지지자들은 워런의 공약이 ‘자본주의의 퇴장’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며 아울러 다른 서구 국가들은 이미 워런이 제시한 것과 같은 개선된 자본주의 체제 아래 있다고 역설한다. 이들에 따르면 많은 서구권 국가가 이미 전 국민 의료보험 제도를 시행하고 있으며 독일은 대기업 이사회에 노동자 대표가 있다.
아울러 워런의 공약으로 중소기업들이 대기업 분사 혜택을 볼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금융 전문 자문업체 배리언트퍼셉션의 조너선 테포 최고경영자(CEO)는 “워런이 IT 대기업을 분할하면 더 많은 경쟁과 혁신을 볼 수 있을 것”이라며 “AT&T의 아성이 깨진 뒤에 미국 통신과 하이테크 분야가 번성하기 시작했다. 마찬가지로 컴퓨터 시장에서 IBM의 지배력이 무너진 것은 1980년대와 90년대 소프트웨어 산업의 번창으로 이어졌다”고 설명했다.
많은 기업 리더가 워런의 목표를 문제 삼고 있지는 않지만, 그가 목표 달성을 위해 제시한 수단과 속도에 대해서는 우려하고 있다고 WSJ는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