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헌법에는 대통령을 최고행정권자(제2조1항)이자 군대의 최고사령관(제2조2항)으로, 마치 무소불위의 권력자처럼 규정하고 있지만, 의회주의에 따라 입법권에 대해서는 거의 권한이 부여되지 않아 당시 대통령은 사실상 매우 무기력한 존재였다.
지금도 헌법상으로 달라진 건 없다. 대통령에게는 법안 발의권도, 예산 작성권도 없다. 의회 출석권도 없다. 그래서 대통령이 의회에서 연설한다고 하면, ‘의회의 초청을 받아’ 방문해 국정에 대해 설명하거나 그때그때 중요 사안에 대해 보고하는 게 전부다.
또 미국 대통령은 외교정책 결정에 대해서도 의회의 제약을 받는다. 대통령이 다른 나라와 체결한 조약은 상원에서 출석 의원 3분의 2 동의 없이 비준할 수 없다.
이처럼 별 볼 일 없던 미국 대통령의 존재감은 1930년 대공황을 계기로 격이 달라진다. 미증유의 대공황 위기에서 미국을 구하기 위해선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당시 제32대 대통령에 취임한 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뉴딜 정책’을 밀어붙일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절박함이 반영된 것이었다.
대공황에 이은 제2차 세계대전과 미·소냉전의 시작은 의회와 달리, 민첩하게 상황 대처가 가능한 백악관에 더 큰 힘을 실어줬고, 의회도 이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백악관에 대통령보좌관과 국가안전보장회의(NSC)가 생긴 것도 이때였다.
그러다가 미국 대통령의 권력이 정점에 달한 건 제37대 대통령인 리처드 닉슨 때였다. 닉슨은 권한이 강화된 백악관의 시스템을 최대한 활용, 소수로 구성된 NSC를 사실상 외교정책결정기관으로 격상하고, 이를 이끌던 헨리 키신저에게 전권을 부여하면서 외교권까지 백악관으로 가져왔다. 닉슨에게 ‘제왕적 대통령’이란 별명이 붙은 이유다.
하지만 의회를 무시하고 제왕적 대통령으로 군림한 닉슨도 결국은 독주의 결정판인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인해 무너졌다. ‘중국 마오쩌둥과 처음으로 악수한 평화주의자’, ‘사상 보기 드문 권력 남용자’ 등 닉슨에 대한 평가는 분분하지만, 어쨌든 그는 역사상 ‘제왕적 대통령’으로 기록됐다.
이후 9·11 테러를 계기로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한 조지 W. 부시에 이어 닉슨을 능가하는 제왕적 대통령이 등장했는데, 바로 도널드 트럼프 현 대통령이다.
트럼프는 거대 위기가 겹겹이 미국을 덮치면서 취임 이래 최대 위기를 만났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통계에서 미국은 세계 톱을 찍었고, 이로 인해 그가 치적으로 내세웠던 경제도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다.
얼마 전 출간된 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의 회고록 ‘그 일이 일어난 방’은 임기 3년간 트럼프의 행적을 천하에 상기시키는 것이었다. 외교의 틀을 무시하고, 충동적이고, 고집스럽고, 개인의 이익이나 정치적 이익만 중시하고, 거래 성사에만 혈안이 된, 신보수주의자도 자유주의적인 국제주의자도 아닌, 모든 독재자들과 다름없는 냉소적인 인물 말이다.
트럼프는 자신에게 부정적인 모든 타인과 타국을 미워하고, 자신의 지지층에는 약한 존재로 보이는 걸 질색한다. 재선에 유리한 상황을 위해서라면 적대적 관계도 우방으로 만드는 ‘쇼통령’이기도 하다.
이처럼 제왕적 대통령으로서 트럼프의 면모를 부각시키는 결정판은 얼마 전 러시아 스캔들 혐의로 복역을 앞둔 40년 지기 친구이자 비선 참모였던 로저 스톤을 감형해준 것이다. 이는 대선 국면에서 미국 사회를 뒤흔들고 있다. 언론들은 “닉슨도 넘지 않은 선을 트럼프가 넘었다”며 연일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는 ‘법과 질서’를 이번 대선의 간판으로 내세우고선 ‘내로남불’ 식으로 권력을 남용하는 트럼프의 이해 상충에 대한 우려 이상의 문제다. 세계 최강국 미국에서 이런 불안정한 권력이 지속되면 국제 사회의 혼란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이 혼란을 끝낼 것이냐, 이어갈 것이냐는 11월 미국의 선택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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