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주력 부대는 ‘개마무사(鎧馬武士)’로 구성되어 있었다. ‘개마’란 기병이 타는 말에 갑옷을 입힌 것을 말하며 개마에 탄 중무장한 기병을 ‘개마무사’라고 부른다. 기병이 아무리 용맹하더라도 말이 부상당한다면 전투력이 저하될 수밖에 없으므로 말의 안전은 기병 못지않게 중요하다. 그래서 고구려 기병은 말까지 철갑옷으로 무장시켰다. 개마무사의 주무기는 창이다. 이 창은 보병의 창보다 길고 무겁다. 기병용 창을 삭(槊)이라 한다. 중국식 삭은 보통 4m 정도인 데 반하여 고구려군의 삭은 평균길이 5.4m에 무게는 6~9㎏이었다.
개마무사가 밀집대형 혹은 쐐기꼴(∧) 대형으로 5.4m가 넘는 긴 창을 어깨와 겨드랑이에 밀착시키고, 말과 기사의 갑옷과 체중에 달려오는 탄력까지 모두 합하여 적에게 부딪치면 보병으로 구성된 적군의 대형은 무너지게 마련이다. 이때 대기하고 있던 보병 등이 신속하게 투입되어 전세를 장악하여 승패를 결정지었다.
철투구와 철갑옷으로 무장하고 말까지 철갑옷을 입힌 고구려의 중무장 기병들은 적에게 공포와 위협의 상징이었다. 개마무사들은 전투 제일선에서 적진을 돌파하는 돌격대였고 방어전에서는 전면에서 적의 공격을 방어하는 방호벽이었다. 개마무사는 현대로 치면 탱크와 같은 역할을 수행했다. 개마무사들은 적의 활 공격은 물론 웬만한 창에도 피해를 입지 않았으므로 고구려군은 백전백승할 수 있었다. 고국원왕의 무덤이나 덕흥리 벽화무덤에 있는 고분벽화를 보면 행렬도에 왕과 귀족의 수레 가장 가까이에 개마무사들이 열을 지어 행진하고 있다. 이는 전투 시나 행군 시 개마무사들이 항상 전면에 나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42년 고구려의 동천왕은 철기병, 즉 개마무사 5000명을 동원하여 중국 삼국시대의 위나라를 공격하여 승리했다. 서양에서 개마는 13세기에야 나타난다. 1221년 페르시아의 우르겐지에서 몽고족과 전투를 벌였는데 이때 다량의 개마가 출현했다. 이로 미루어 고구려의 개마가 얼마나 빠른 시기에 도입되었는가를 알 수 있다.
개마무사의 철갑옷은 찰갑과 판갑으로 나뉘는데 고구려의 철갑옷과 철모는 대부분 물고기 비늘처럼 얇은 철판을 네모나고 잘게 잘라 가죽으로 이어 제작한 찰갑(札甲) 형태다. 말과 사람을 위한 갑옷을 철로 만든다는 것은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우선 개마를 만들 수 있는 철 기술과 아울러 경제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고구려에서 다른 나라보다 먼저 철기가 발달한 것은 고구려 영토에서 질 좋은 철광석이 많이 생산되는 데다 고조선으로부터 뛰어난 제련기술을 이어받은 뒤에 그 기술을 한층 더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중국에서의 철기 사용은 기원전 1100년경이지만 기원전 7세기인 춘추전국시대에 비로소 주철의 주조에 성공했는데, 중국 전국시대의 유적지 가운데 철기가 출토된 20여 곳 대부분이 고조선 영역이다. 이들 유물이 중국인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그 지역에 살고 있던 고조선인들에 의해 독자적으로 개발되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러운 추론이다.
놀라운 것은 그 당시에 이미 강철을 주조하는 첨단기술까지 보유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한민족이 생산한 강철은 고온의 용광로에서 직접 얻은 질 좋은 것으로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확보하지 못한 기술이었다. 그 연대도 무려 기원전 12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강철을 만들기 위해서는 철의 용융점이 1539도이므로 제련로 안의 온도를 1500도 이상 올려야 한다. 그런데 고조선 지역에서 발견되는 강철을 분석한 학자들은 고조선 장인들이 제련로 안의 온도를 적어도 1400도 정도로 유지한 상태에서 철을 14~16시간 정도 녹여냄으로써 질 좋은 강철을 생산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이는 고조선 장인들의 완벽한 제련로 설계, 연료와 탄소 공급원으로서의 숯의 사용, 효율적인 송풍관 등의 덕분이다.
고구려 동천왕이 개마무사 5000명을 동원했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그들을 무장시키기 위한 철의 양을 계산해보면 알 수 있다. 개마무사 1인당 말 갑옷 최소한 40㎏, 장병의 갑옷 무게 20㎏, 기타 장비 10㎏을 휴대한다고 해도 최소한 70㎏의 철이 소요된다. 5000명을 무장시키려면 단순하게 계산하더라도 최소 350톤의 철이 필요하며 예비량을 가정한다면 500여 톤이 있어야 한다. 현대의 제철기술로는 500여 톤이 그다지 크지 않겠지만 약 1800년 전에 이 정도로 많은 양의 철을 생산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생각하면 실로 뿌듯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참고문헌 :
『조선광업사』, 리태영, 공업종합출판사, 1991
『신라 법흥왕은 선비족 모용씨의 후예였다』, 장한식, 풀빛, 1999
『전통 속의 첨단 공학 기술』, 남문현 외, 김영사, 2002
「완벽한 무장세트’… 韓·中·日 3국 중 첫 발굴」, 최영창, 문화일보, 2009.06.02
「불의 힘, 숯과 다시 통하였는가」, 강숙희, 행복한 E, 2009. 1·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