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은 권력’ 의결권 자문사]②회장님도 날려버리는 ‘자문의 힘’

입력 2021-03-09 17:00 수정 2021-03-09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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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사는 (2021-03-09 16:00)에 Channel5를 통해 소개 되었습니다.

2019년 3월 27일 오전 서울 강서구 공항동 대한항공 빌딩. 제57기 정기 주주총회에서 대한항공 주주들은 조양호 전 한진그룹 회장을 자리에서 몰아냈다. 조 전 회장의 이사 연임 안을 놓고 주주들이 투표한 결과 찬성 64.1%, 반대 35.9%로 부결했다. 재벌 총수가 회사 주인인 주주들의 선택으로 이사진에서 퇴출당한 것은 사상 처음이다. 참여연대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등은 “우리나라 소액주주운동 역사상 가장 많은 주주의 참여를 끌어낸 사례로, 조 회장의 연임을 반대하는 주주들의 의지가 매우 확고하다는 것을 보여줬다”고 자평했다.

충격이었다. 재계와 자본시장에서는 이 사건이 자본시장의 틀 안에서 주주들이 재벌 총수 중심의 후진적 경영 행태와 이에 따른 기업가치 훼손 등 ‘오너 리스크’에 제동을 걸었다는 점에서 재계 전반에 적잖은 변화를 줬다고 지적한다.

이 같은 변화 뒤에는 의결 자문사들이 잇따라 반대 의견을 낸 영향이 컸다고 분석한다. 서스틴베스트 등 국내 의결권 자문사들은 주총 후 “역사적인 사건” “자본시장의 촛불혁명”이라고 평가했다.

국민연금 등 기관들의 자문 역할을 하는 ‘의결권 자문사’의 위상이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 주주총회는 물론 기업 인수합병(M&A), 기업 분할, 이사 선임 등 다양한 곳에서 목소리를 내고 있다. 특히 ISS (Institutional Shareholder Services)등과 같은 글로벌 자문사는 외국인 투자자들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미치는 것으로 평가된다.

◇“반대” 한마디에 천당과 지옥=LG화학은 지난해 10월 서울 여의도동 LG트윈타워 동관 대강강에서 열린 주주총회에서 전지사업부를 분할했다. 개인 투자자와 함께 2대 주주인 국민연금이 분할에 반대 의견을 밝혀 긴장감이 돌았지만, 외국인·기관투자자들이 상당부문 찬성했다. 외국인·기관투자자들에게 입금이 큰 의결권 자문사의 지지 덕분이다.

대림산업은 ISS와 글래스루이스 덕에 무난하게 기업을 분할했다.

반면 KB금융지주 우리사주조합은 사외이사 후보자를 올리는 데 실패했다. KB금융 지분 9.97%를 보유한 최대주주 국민연금과 국내 최대 의결권 자문사 한국기업지배구조원(KCGS)이 이번 우리사주조합 주주제안에 반대하고, KB금융 지분 65%를 보유한 외국인 주주 표심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ISS 역시 부정적인 태도를 보인 탓으로 해석된다.

‘숨은 권력자’의 힘은 곳곳에서 목격된다.

2019년 4월 박삼구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이 감사보고서 파문(비적정)으로 물러난 것도 좋은기업지배구조연구소의 목소리가 컸다. 연구소는 “(박 회장은) 그룹 차원의 의사결정을 중요하게 판단해 개별회사 간 이해충돌이 발생하는 경우 적절하지 못한 의사결정을 할 위험이 있다”는 의견을 냈다.

지난 2018년 KT&G의 사장 연임안, 맥쿼리 인프라의 운용사 교체안, 현대차그룹의 지배구조 개편안 등에서도 자문사들의 판단은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현대자동차의 사례는 ‘살아있는 권력’이라는 평가까지 나왔다. 지난 2018년 3월 현대차그룹은 순환출자 고리를 끊기 위해 ‘현대모비스→현대차→기아차’로 단순화하는 지배구조 개편안을 추진했지만, 사모펀드 엘리엇과 국내외 의결권 자문회사들이 “주주 이익에 반한다”고 반대해 무산된 바 있다. 덕분에 5대 그룹 중 현대차그룹이 유일하게 순환출자 고리를 끊지 못했다.

◇목소리는 커진반면, 책임은(?)=올해도 의결권 자문사들의 존재감을 드러낼 전망이다. 대신지배구조연구소는 600여개 이상의 주총 안건 분석에 들어갔고, 기업지배구조원과 서스틴베스트는 각각 400개, 200 안건을 분석 중이다.

하지만 국내에는 의결권 자문사들을 관리·규율할 법령이 부족해 이들의 자문 능력을 제대로 검증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많다. 미국은 금융 당국이 자문사들을 직접 관리·감독하고 있지만, 국내 자문사는 컨설팅업이나 여론조사업으로만 등록돼 있어 별다른 관리와 감독을 받지 않는다. 각종 정보를 모두 공개하도록 한 미국과 달리, 한국의 자문사들은 재무제표 외에 별다른 공시의무도 없다. 직원은 어떻게 구성되는지, 의사 결정 과정은 어떻게 이뤄지는지 핵심 정보는 모두 공개되지 않는다. 소액주주나 기관투자자로서는 어떤 자문사를 무슨 기준으로 선택할지 판단할 근거 자료가 없는 셈이다.

아이러니 하게도 이들의 입김은 매년 쎄지고 있다. 올해 주주총회를 계기로 공정하고 정확한 의안분석서비스를 위해 최소한의 공적 규율을 도입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시연 한국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분석의 신뢰성 확보를 위해서는 그 결과가 근거한 객관적 사실과 분석 절차, 평가 체계의 합리성 등이 분석을 제공받는 기관투자자들에게 충분히, 정확하게 파악될 수 있어야 한다”면서 “조사 변수, 모형 또는 방법론, 자료의 출처 등이 구체적으로 제공돼야 한다”고 말했다.

또 의결권 자문사에 대해 ‘등록제’를 적용하고 최소한의 인력, 의결권 자문사의 이해, 거래, 계약관계 등 공시 요건 등을 부과해야 한다는 조언도 나온다. 현재로써는 의안 분석 담당자의 상법 등 관련 법률에 대한 지식수준, 관련 경력 보유 여부가 공개되지 않아 전문성을 확인하기 어렵다.

안유미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원은 “국내 의결권 자문 시장은 아직 태동기 단계다. 의결권 자문 시장의 성장과 의결권 자문업무의 공정성 및 전문성 제고 사이의 적절한 균형을 위해선 추가적인 진입장벽은 두지 않는 대신 의결권 대리행사에 대한 기준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금융위원회는 올해 주요 업무계획 중의 하나로 ‘의결권자문사의 신뢰성 제고를 위한 제도정비’를 꼽았다. 현재 금융투자업계와 논의를 진행, 의결권자문사에 대한 등록제 도입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연내 제도 정비를 마무리하면 내년 주총부터 의결권 자문사의 공시 의무가 강화될 예정이다. 금융위원회 관계자는 “자문사의 행동강령, 이해상충 방지와 통제 방안, 분석능력과 전문성 등에 대한 정보를 금융투자업자에게 정기적으로 제공하고, 대외적으로 공개하는 등 단계적으로 관리감독을 강화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다른 한편에서는 스튜어드십 코드(기관투자가의 투자 기업에 대한 경영 참여)도입과 ‘ESG컨설팅’시장 확대로 이해상충(기업과 자문서, 기관과 자문사)을 걱정하는 목소리도 커졌다. 최문희 강원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의결권 자문회사에 관한 입법 과제와 법적 쟁점’이라는 논문에서 “의결권 자문회사는 발행회사에 대해 지배구조 컨설팅에 대한 보수를 받으면서 발행회사의 안건에 대해서 반대 권고를 하기 어렵다”면서 “의결권 권고 시에 다른 서비스 제공 사실을 공시하고, 감독기관의 규제에서는 겸업 업무의 수행에 대해 신고하는 등의 제도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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