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저우 사람 있는 곳엔 시장이 있다”
“시장이 있는 어느 곳이든 원저우 사람이 있고, 시장이 없는 곳이면 곧 원저우 사람이 나타난다.”
그래서 원저우 사람들은 할아버지, 아버지, 손자 구분 없이 비록 몇 대(代)가 마루판에서 함께 새우잠을 잘지라도 남에게 고용되는 것보다 자기가 가게를 내고 ‘사장’을 하고자 한다. 그 많은 ‘사장’들은 구두수선공, 재봉사, 판매원 등등 출신이다. 먼저 가게를 내고 나중에 공장을 세우는 것은 대부분의 원저우 사람들의 창업에서 볼 수 있는 흔한 광경이었다. 그래서 원저우 사람들이 라이터나 안경, 구두, 의류, 나사, 밸브와 같은 ‘소상품’ 생산에 집중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이렇게 하여 원저우 사람 네 명 중 세 명은 모두 사장(라오반, 老板)이었다.
현대에 이르러 상업 도시 혹은 창업 도시로서의 이러한 원저우의 성격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낸 사람은 바로 저우다후(周大虎)라는 인물이다. 그는 보잘것없어 보이는 라이터 생산으로 무려 전 세계 시장의 90%를 석권하였다.
저우다후는 1952년 원저우에서 태어난 원저우 토박이다. 그의 부친은 중국 혁명에 참가했던 ‘노혁명가’로서 저우다후의 유년 시절은 비교적 안온하고 평화로왔다. 그러나 중국 현대사에서 비극 중의 비극인 문화대혁명의 광풍이 불면서 부친은 ‘우파’로 몰리게 되었고, 모친도 ‘하방’하게 되었다. 저우다후의 운명도 급전직하하였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농촌으로 ‘하방’했지만, 낯선 농촌에서 살아갈 방법을 도무지 찾을 수 없었다. 그는 17세 되던 해에 고향 친구 몇 명과 외지로 나가 유랑 생활을 거듭하였다. 단지 먹고살기 위해서 시안(西安)을 비롯하여 안후이(安徽) 그리고 후베이(湖北), 장시(江西) 등지를 떠돌아야 했다. 그러다가 25세에 원저우 우체국 직원으로 취직할 수 있게 되었다.
우체국 직원에서 라이터공장 사장으로
그는 같은 시기에 입사한 직원 중 가장 빨리 간부로 선발된 유능한 직원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의 아내가 다니던 공장이 도산하고 아내가 일자리를 잃자 그의 살림살이가 어려워지기 시작하였다. 1985년 당시 원저우에는 이미 공장 몇 곳에서 라이터를 생산하고 있었다. 저우다후는 “라이터는 만들기도 쉽고 원저우에 부품회사가 많아 적은 자본으로도 생산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아내의 퇴직금 5000위안을 밑천으로 삼아 라이터를 생산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살고 있던 집의 반에 해당하는 40㎡를 잘라내 공장으로 활용하면서 서너 명의 직원을 채용하고 가내수공업 방식으로 라이터 생산을 시작하였다. 근무 시간 외에 그는 아내를 대신하여 영업과 판매에 나섰다. 그리고 라이터 시장의 이윤이 매우 크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렇게 1년이 지나고 그는 다니던 우체국을 아예 퇴직하였다. 그러고는 200㎡에 지나지 않는 조그만 집을 빌려 간이공장을 만들고 100여 명의 직원을 고용하여 정식으로 창업하였다.
품질 앞세운 ‘호랑이표’ 라이터
그는 무엇보다도 특히 품질관리에 힘썼다. 이 무렵 세계 각국의 바이어들이 원저우에 몰려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원저우에서 라이터 가격은 겨우 10위안인 데 비해 일본이나 한국에서는 200~300위안으로 가격 차이가 무척 컸다. 그러니 저렴한 원저우산 라이터를 구매하려는 각국 바이어들이 원저우에 줄을 섰다. 하지만 원저우의 대부분 생산자들은 눈앞의 이익을 노리고 품질이 떨어지는 저질 상품을 마구 만들어냈다. 시류에 편승하지 않고 오로지 품질 최우선을 견지해온 저우다후는 이러한 상황에 고전할 수밖에 없었다. 가격이 높은 그의 라이터를 판매업자들은 받지 않았다. 이런 상황이 계속 이어지자 그의 공장 직원들도 대부분 그만두고 나갔다. 숙련공이 나가니 신입 직원 교육도 힘이 들었다. 적자는 계속 쌓여갔고, 그의 공장은 생산 중단의 위기까지 몰렸다. 심신이 지친 그는 이 무렵 오토바이 교통사고도 세 차례나 냈다.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하지만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그해가 저물기 전에 외국 바이어들이 그를 찾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외국 바이어들은 원저우에서 쏟아져 나오는 싸구려 저질 상품에 이제 진저리를 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저우다후가 생산하는 라이터를 주목하였고, 품질을 고집하는 그에 대한 신뢰가 쌓이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외국 바이어들의 주문이 물밀듯 쏟아졌다. 이 무렵 그는 하루 5000개의 라이터를 생산할 수 있었지만 5만~6만 개의 주문까지 받았다.
OEM 거부…3대7 비율 지켜내
고작 100~200곳에 지나지 않던 원저우의 라이터 공장은 호황 바람을 타고 1993년에 우후죽순으로 생겨나 무려 3000여 곳이 넘었다. 그러나 품질을 앞세운 저우다후의 ‘호랑이표(大虎牌)’ 라이터는 이제 라이터 시장을 휩쓸고 있었다. 그러자 원저우 라이터 공장의 90%가 문을 닫았다. 저우다후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해외 시장 개척에 나섰고, 불과 몇 년 만에 전 세계 라이터 시장의 90%를 석권하게 되었다. 일본과 타이완 그리고 홍콩의 라이터 공장은 거의 파산했다.
그 무렵 일본을 비롯하여 한국, 미국 등 10여 개국의 기업들이 원저우에서 자신들의 고유 상표를 붙여 주문자 상표 부착(OEM) 생산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저우다후에도 같은 방식의 주문자 상표 부착 생산을 요구하였지만, 그는 단호하게 거부하면서 최소한 자신의 ‘호랑이표’ 상표 라이터가 70%는 유지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어떠한 외국 기업과도 3대 7의 마지노선을 지켜냈다. 일본 최대 라이터 생산업체도 이미 일본 내 생산을 중단하고 원저우에 와서 저우다후와 협력 생산하였다. 일본 기업의 요구 수준은 까다롭기로 정평이 났지만, 저우다후는 2년 만에 그 요구 수준에 완전히 도달하였다.
EU 반덤핑 조사도 정면 대응
2002년 유럽연합(EU)은 ‘호랑이표 라이터’에 반덤핑 조사를 개시하였다. 이때 이미 원저우 권련업계의 대표적 인사로 부각된 저우다후는 이 사태를 중시하여 대응책을 주도적으로 실행하면서 유럽위원회에 논리 정연한 반박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반덤핑 혐의를 벗고 승소하였다.
저우다후는 현재 저장다후(大虎)라이터공사의 CEO이자 원저우권련협회장으로서 여전히 현역으로 활약하고 있다. 그의 성공에는 그의 치열한 승부정신과 품질 최우선주의가 있다. 그는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품질과 지명도 제고로 난국을 돌파해왔다.
“의지와 인내력을 가지고 끝까지 견뎌내면, 반드시 승리를 거둘 수 있다.” 그의 신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