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료실 풍경] 의사보다 똑똑한 아가야, 고마워

입력 2021-03-24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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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유미 전북대병원 산부인과 의사

며칠 전 응급실로 양수가 터진 것 같다는 30주 산모가 전원되었다. 아니길 바랐건만, 왜 불길한 예감은 늘 틀리지 않는 걸까. 질 내로 도구를 삽입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고여 있던 양수가 줄줄 흘러나왔다. 항생제 투여 등으로 아슬아슬하게 기대요법을 이어가던 중 1주일의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결국 진통이 시작되고야 말았다.

분만 시 통증의 강도는 사람마다 표현하는 정도만 다를 뿐 맨정신에 손가락을 절단하는 것에 버금가는 아주 극심한 통증인데, 이러한 상황에서도 대다수의 산모들은 자신보다 뱃속의 아가를 걱정한다. “아이는 괜찮나요?” 오늘 산모도 내게 같은 질문을 던졌다. 그녀의 물음은 답을 듣고 싶어서라기보다는 확인을 받고 싶어서가 아닐까.

“괜찮을 거예요.” 의학적 지식에 산모와 아가를 응원하고 싶은 마음을 보태어 이렇게 대답했다. 거짓말이 아니라 실제로 뱃속의 아가들은 엄마가 아플수록 더 강해진다. 조산아의 경우 출생 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자발호흡 여부를 결정하는 폐 성숙 정도이다. 그런데 이 산모처럼 양수가 미리 파수된다거나 엄마의 혈압이 아주 높은 경우, 같은 주수의 아가들보다 성장이 더딘 아가들이 비슷한 주수의 건강한 아가보다 폐 성숙이 더 촉진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태반 기능이 떨어지면 태아의 심장은 다른 장기로 가는 혈액을 줄이고 뇌로 대부분의 혈액을 보내 가장 중요한 장기를 보호한다. 척박한 땅에서 더 예쁜 꽃이 자라듯 어려운 자궁 내 환경에서 스스로 생존할 길을 찾는 것이다.

이럴 때마다 뱃속의 아가가 10년 넘게 공부한 나보다 훨씬 낫다는 생각이 든다. 로봇이 수술하고 인공 심장, 인공 눈을 넘어 인공 자궁까지 개발되고 있는 최첨단 시대에 아직도 산과 영역에는 원인을 알 수 없거나 해결할 수 없는 질환들이 많이 남아 있다. 37주 이전에 양수가 먼저 파수되어도 양막을 다시 복원할 방법은 없으며, 진통이 걸리지 않도록 기다리는 것만이 최선의 치료라는 말을 전할 때마다 의사로서의 무능함에 좌절감을 느낀다. 엄마가 아플 때 다른 친구들보다 열심히 일해 스스로 폐를 성숙시키다니, 뱃속의 아가가 기특하면서도 내가 해야 할 일을 대신하고 있는 것 같아 미안할 따름이다. 오늘 태어난 아가도 대기시켜 놓았던 심폐소생술을 위한 장비들을 쓸모 없게 할 만큼 청명한 울음소리로 산모와 나의 걱정을 한순간에 녹여 주었다. 이 소리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듣기 좋은 울음소리가 아닐까.

홍유미 전북대병원 산부인과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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