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량용 반도체 공급 부족 문제가 현대·기아차 등 국내 제조사들로까지 번졌다. 정부도 수급 불균형을 해결하기 위해 각종 방책을 강구하고 있지만, 현실적인 문제로 난항을 겪고 있다.
국내 업체들이 당장 차량용 반도체 생산량을 늘리기엔 환경적 어려움이 뒤따르는 데다, 중장기적 대책 수립에도 고려해야 할 점이 많기 때문이다.
31일 반도체 업계에 따르면 산업통상자원부가 이달 초 현대차, 삼성전자, DB하이텍, 텔레칩스 등 완성차와 반도체업체를 모아 발족한 ‘미래차-반도체 연대 협력 협의체’는 차량용 반도체 부족 사태와 관련한 대책을 마련하기 위한 실무 협의를 이어가고 있다.
이외에도 국내 파운드리에 대한 구체적인 지원책을 세우기 위해 일부 업체들과의 별도 협의도 이뤄진 것으로 파악됐다.
그러나 반도체업계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다. 현재 사태에 도움이 될 수 있는 해결책이 단기적으로 나오기 어렵다는 게 이유다. 단기적 시각으로만 접근했을 때 이 같은 일이 또다시 반복될 수 있다는 우려도 담겨 있다.
업계 관계자는 “협의 과정에서 정부 쪽에서 ‘부족한 차량용 반도체 부품을 증설할 수 있는 상황이냐’고 물었고, 아니라고 답했다”라며 “국내 업체에서 이 문제에 곧바로 대응할 수 있는 곳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차량용 반도체 특성에 기인한다. 생명에 직결되는 부품이라는 점에서 인증 절차가 길고 까다로운 동시에, 자동차 제품 교체 수기가 길어 재고 관리도 여타 IT 제품보다 까다롭다. 여기에 단가는 IT 반도체보다 훨씬 낮은 수준이다.
게다가 차량용 반도체는 단가와 생산량 특성상 주력 공정인 12인치(300㎜)가 아니라 8인치(200㎜) 공장에서 생산되는데, 8인치 장비가 신규 생산되는 곳이 없다시피 하는 데다 중국 영향으로 중고 장비마저 품귀 상황이라 유의미한 증설도 어렵다.
그만큼 중소업체가 뛰어들기엔 힘든 사업이라는 뜻이다. 그렇다고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로서도 수익성이나 라인 전환ㆍ증설 가능성을 고려했을 때 차량용 반도체 비중을 바로 늘리기는 쉽지 않다.
또한, 차량용 반도체를 일부 생산하는 업체라 해도, 현재 공급이 가장 부족한 부품으로 손꼽히는 MCU(마이크로 콘트롤 유닛)와는 거리가 먼 경우가 많다는 게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업계 다른 관계자는 "협의체가 생겨 중장기적으론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본다"라면서도 "자동차 업계 입장에서만 접근할 것이 아니라, 반도체 업계 전체를 폭넓게 보는 시각이 필요한 상황 아닌가 싶다"라고 토로했다.
모바일, 가전도 반도체 공급 부족 이슈에서 자유롭지 못한 데다, 같은 차량용 반도체일지라도 부품마다 수급 상황이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다만 미래차를 대두로 차량용 반도체 시장의 성장이 점쳐지는 만큼, 중장기 대책은 필요한 상황이라는 점에 대해선 공감대가 형성됐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한국은 자동차 생산 세계 점유율(4.3%)에 비하면 차량용 반도체 점유율(2.3%)이 현저히 낮다. 자동차 생산 점유율 10% 안팎을 각각 차지하는 미국과 일본의 차량용 반도체 점유율을 합치면 시장의 절반을 넘어서는 것과 사뭇 대조된다.
정부 역시 이를 위해 2000억 원 이상을 연구ㆍ개발(R&D)에 투입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다는 것이 업계 시각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반도체 관련 교수는 "환영할 만한 일은 분명 맞지만, 지원 금액이 유의미한 프로젝트 만들기엔 부족한 수준"이라며 "공급 부족 이슈 때 '반짝 지원'으로 그친다면 다른 분야에서 언제든 문제는 반복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종호 서울대 반도체공동연구소장은 “자동차 반도체는 기본적으로 성장하는 데 시간이 걸리는 산업"이라며 "장기적으로 공존할 수 있는 생태계를 꾸린다고 생각하고 접근해야 한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