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손유동이 올해 첫 작품으로 뮤지컬 '명동로망스'를 택했다. 2019년 재연 이후 2년 만에 '명동로망스'와 재회하게 된 이유는 '따뜻함' 때문이다. 단순히 장선호 역을 맡았기 때문에 위로를 받는 것이 아니다. 그는 '미묘한' 감정을 느끼며 '명동로망스'와 자신의 로맨스를 그리고 있었다.
'명동로망스'는 2021년을 살아가는 9급 공무원 장선호가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1956년 명동 '로망스 다방'으로 떨어지면서 시작된다. 선호는 은유 시인 박인환, 천재 작가 전혜린, 비운의 삶을 그림으로 투사한 화가 이중섭 등 당대 최고의 예술가와 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자신의 삶을 되짚는다. '명동로망스'는 관객들에게 '힐링극'으로 입소문 나고 있다.
"요즘 '명동로망스'를 모니터링하면서 작품을 전체적으로 보고 있어요. 사실 공연을 보다 보면 특정 인물의 감정선을 따라가게 돼요. 장면마다 감정선이 있을 수도 있고요. 특정 감정선을 따라가다 보면 북받치는 감정을 느끼게 돼서 슬픔을 크게 느끼게 돼요. 하지만 작품을 전체적으로 보면 행복하고 따뜻하고 희망적인 느낌이 들어요."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던 선호는 구시대에 살던 뜨거운 영혼들을 마주한 후 '생의 의지'를 느낀다. 손유동은 이를 "내일 비록 죽을지언정 오늘의 나로 기꺼이 살아내겠다는 마음"이라고 설명했다. 이는 단순히 살고 싶다는 의지에서 그치는 게 아니다.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갈 것인가를 고민하게 되면서 선호는 인생의 변환점을 맞이한다.
"전혜린은 '과연 내가 글을 쓸 수 있을까'라는 고민을 하고, 이중섭은 현실과 이상의 충돌을 경험하죠. 표면적으로 보면 선호는 예술가들에게 감동을 받는 내용이에요. 하지만 조금 더 들여다보면,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있어요. 겉으로만 친한 사이였으면 이들을 살리기 위해 어떻게든 끌고 갔을 거예요. 그런데 예술가들의 신념을 존중하고 존경하다 보니 그들이 죽음 앞에서도 글을 쓰는 걸 말릴 수 없었던 거예요."
손유동은 '명동로망스'로 무대에 오를 때마다 뜨거운 눈물을 흘린다. 지난 시즌에선 정든 예술가들의 죽음이 슬퍼서 눈물이 흘렀다면, 이젠 그들의 죽음을 인정할 때 울컥한다는 그다. 그는 예술가들과 이전보다 더 깊은 상호작용을 하고 있었다.
"장선호가 박인환하고 잠시 다투는 장면이 나와요. 윤석원 형하고 이 부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어요. 그들은 감정적으로 싸우는 게 아닌, 구시대와 현시대 사람으로서 가치관이 충돌하고 있는 거라는 결론에 도달했어요. '나 열심히 살았어요. 공무원이고 돈 열심히 모았어요'라고 선호는 말해요. 현실에선 그게 열심히 사는 거였죠. 하지만 구시대 예술가들은 자신을 깨우치고 자기 말의 무게를 느끼는 게 열심히 살아내는 증거였던 거예요. 서로의 차이를 받아들이고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 것 같아요."
1956년대 청춘들을 극을 통해 만나고 있는 손유동은 자신을 스스로 '어린애 같다'고 말했다. "그때의 33살과 지금의 33살은 다르잖아요. 그땐 30대면 한 집안의 가장 이미지가 컸으니까요. 이중섭, 박인환은 몇 살 차이 안 나는 형들인데 마치 20살 이상은 차이 나는 것 같지 않나요?"
손유동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를 극렬하게 실감하기도 했다. 뮤지컬 '비스티'가 끝나고 넉 달 만에 무대를 선 것에 대해서는 "이런 적이 없었는데, 혼란의 시기를 겪었다"고 말했다. 연극 '알앤제이'에서 '학생 3' 역에 출연하려던 계획도 코로나19로 작품이 밀리면서 포기했다고 털어놨다.
"슬럼프였어요. 쉬는 게 쉬는 거 같지도 않았어요. 코로나 때문에 모든 게 빼앗긴 기분이었어요. 어디 가지도 못한 채 집에만 있었는데, 오랜만에 집 밖을 나서니 차를 어디에 주차해뒀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 거예요. 코로나 이전에 한 달 쉬었을 땐 내내 여행 다녔는데, 지금은 완전히 달라졌죠."
손유동은 자신을 가장 행복하게 하면서도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게 해준 '무대' 덕분에 이 슬럼프를 극복하는 중이다. 무대는 NG가 있는 것도 아니고 단 한 번의 실수로 무너질 수도 있는 거라 생각해 과거엔 스트레스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이전에 온전히 느끼지 못했던 행복을 더 크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저를 요새 가장 기쁘게 하는 것도 '명동로망스'이기도 해요. 무대가 끝나면 극장 측에서 팬들의 편지를 전달해줘요. 마치 전쟁 속에서 피어난 희망처럼 코로나를 뚫고 받은 편지가 정말 값지더라고요. 심지어 편지를 한 시간 넘게 소독해서 주는 거라고 들었어요. 편지 매수도 예전보다 훨씬 많아요. 퇴근길에서도 만나지 못하기 때문에 편지가 더 두꺼워지는 거 같아요. 감사할 따름이에요. 편지를 읽으면 많은 감정이 느껴집니다."
손유동에게 과거의 어느 순간으로 이동하는 장선호처럼 과거로 갈 수 있다면 언제로 가고 싶은지 묻자 "부모님의 청춘 시절로 가고 싶다"는 답을 내놨다. 그때의 부모님을 상상하면 울컥하기도 한단다.
"그들도 우리 또래처럼 연애도 하고, 좌절도 했을 거고 꿈도 있었을 거예요. 실패와 절망도 경험했겠죠. 하지만 지금은 '산' 같은 존재로 계시잖아요. 흔들리고 청춘이었던 시절의 부모님을 만나서 술 한잔하고 싶어요. 제 얘기 말고 부모님 이야기를 친구처럼 듣고 나누고 싶어요."
사뭇 진지해지는 분위기를 무마하기 위해서인지 엉뚱한 대답도 내뱉었다. "과거로 가면 지금 많이 오른 주식을 살래요. 또 정신 못 차리는 저를 혼내주고 싶어요. 아 참, 건강도 챙겨야 하는데."(웃음)
손유동은 대극장·소극장 뮤지컬, 연극, 영화, 드라마 어느 것에도 갇히지 않는 배우가 되고 싶다는 소망도 드러냈다. 성대결절을 심하게 앓은 이후 노래 레슨을 받기 시작한 것도 '다양한 시도'를 하기 위해서다.
"묵은지 같은 사람이 되고 싶어요. 자극적인 매운맛을 먹으면 강하게 각인되겠지만, 지금은 은은하게 남는 배우가 되고 싶다는 마음이 커요. 빈티지 소파, 와인, 유명 예술가들의 그림은 시간이 지날수록 가치가 올라가잖아요. '명동로망스'가 그래요. 남들이 평가하는 가치도 중요하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더 깊어지는 저를 만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