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기과열지구 이어 이중규제 논란
서민 자금조달계획 차질 불가피
고금리 대출 수요 확산 가능성
"집값 잡으려다 주거 불안 키워"
내 집 마련 실수요자들이 ‘대출 축소’라는 날벼락을 맞았다. 정부가 가계대출 총량 조절 명목으로 시중은행 주택담보대출을 옥죄자 은행들이 일제히 대출 문턱을 높였기 때문이다. 당장 새 아파트 입주를 앞둔 수요자들은 잔금대출액이 반 토막 나 자금 조달에 애만 태우고 있다. 시중은행 대출이 막히면 자금 조달력이 부족한 서민들의 경우 제2금융권 등 고금리 시장으로 내몰릴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금융권에 따르면 KB국민은행은 29일부터 집단대출 한도를 대폭 줄였다. 앞서 전세대출과 주택담보대출 한도를 축소한 이후 집단대출에도 손을 댄 것이다. 국민은행은 입주 잔금대출 기준을 ‘분양가와 KB시세, 감정값 중 최저금액’으로 변경했다. 기존 ‘KB시세 또는 감정값’에서 분양가를 추가했다. 입주 잔금대출 기준을 사실상 분양가격으로 바꾼 것이다.
새 기준을 적용하면 대출한도는 절반 이하로 줄어들 수밖에 없다. 기존에는 입주 때 시세 기준으로 대출을 받아 잔금을 치렀다. 최근 수년간 부동산 상승장이 계속된 만큼 입주를 앞둔 수요자는 분양가보다 더 오른 시세를 고려해 대출 계획을 세우는게 일반적이다.
예를 들어 투기과열지구인 서울에서 7억 원에 분양받은 아파트의 입주 때 시세가 12억 원이라면 지금까지는 시세인 12억 원을 기준으로 LTV(주택담보대출비율) 40%를 적용해 4억8000만 원을 대출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새 기준으로는 분양가 7억 원의 40%인 2억8000만 원만 대출받을 수 있다. 이는 대출 한도가 두 번 줄어드는 것으로 사실상 이중 규제라는 지적이 많다. 정부의 규제지역 지정으로 대출 한도가 축소된 데다 은행이 분양가를 잔금대출 기준으로 적용하면서 대출액이 더 줄어든 것이다.
시중은행의 오락가락한 잔금대출 기준도 문제다. 새 대출 적용 기준(시세와 분양가 중 낮은 가격)에 따르면 입주 때 시세가 15억 원을 넘으면 대출을 받을 수 없어도 분양가를 적용하면 잔금대출이 가능하다. 현재 투기과열지구 기준 시세 15억 원 이상 주택은 대출을 받을 수 없지만 그 이하는 대출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국민은행 측은 “시세 15억 원 초과 시 (정책대로) 대출이 불가하고 시세 15억 원 미만 주택의 대출 가능액 산정 때만 새 기준을 적용한다”고 했다.
부동산 대출 제한은 시중은행 전방위로 확산할 조짐이다. 하나은행은 다음 달 1일부터 모기지신용보험(MCI)과 모기지신용보증(MCG) 일부 상품 가입을 한시적으로 제한한다. 두 상품은 주택담보대출을 받을 때 가입하는 보험으로 이 보험이 없으면 대출 한도가 줄어든다. 앞서 NH농협은행은 부동산 대출 한도를 대폭 축소하고 일부 대출 상품은 판매를 중단했다.
당장 올 연말 입주를 앞둔 실수요자들은 애만 태우고 있다. 온라인에선 은행의 잔금대출 규제에 대한 불만이 폭주하고 있다. 이렇다 보니 온라인 부동산 카페에선 “시세와 분양가 중 낮은 금액 기준으로 대출이 나오므로 입주할 아파트의 시세는 15억원이 넘지만 분양가가 저렴해 잔금대출이 가능할 줄 알았는데 대출을 아예 못받게 된다니 말이 되느냐”는 글이 적잖게 올라오고 있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집단대출 막으면 실수요자는 죽어야 하느냐’는 청원이 27일 게재됐다. 해당 청원자는 “2010년 하남에서 생애최초 자격으로 사전청약을 넣어 11년을 기다린 끝에 다음 달 입주를 앞두고 있다”며 “사전청약 당시에는 대출 제한이 없었지만 지금은 집단대출 한도를 줄인다고 한다. 대출받아 잔금을 치러야 하는 서민에겐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라고 호소했다.
시중은행 집단대출이 막히면 자금 조달력이 약한 서민들은 2금융권 등 고금리 대출에 기댈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오히려 가계대출 부실을 키울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김인만 김인만부동산연구소장은 “금융당국이 잔금대출마저 규제하면 무주택 실수요자가 청약으로 집을 마련하는 일조차 어렵게 된다”며 “정부는 부동산 대출을 줄여 집값을 잡으려는 요량이지만 오히려 서민들의 주거 불안만 키우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