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위기 과정서 합의된 글로벌 스탠더드
과거 2008년 금융위기는 금융안정이사회(Financial Stability Board)를 비롯한 각국 금융당국에 필연적 ‘대마불사’ 문제라는 숙제를 남겼다. 이는 거대 금융기관이 파산 위험에 노출될 경우 각국의 금융·경제 시스템에 대한 심각한 악영향을 우려하여, 해당 금융기관을 파산시키지 못하고 공적 자금을 투입하여 구제할 수밖에 없다는 경험을 바탕으로 한다. 이후 금융안정이사회를 중심으로 오랜 논의를 거쳐 글로벌 시스템상 중요한 금융기관들에 대한 파산처리제도에 대한 최종 합의가 도출되었다.
여기에는 주요 금융기관(거대 금융지주회사의 자회사)이 파산 위험에 노출될 경우 은행업, 증권업, 보험업 등의 실질적 업무를 수행하지 않는 지주회사로 해당 자회사의 손실을 넘기고 지주회사를 파산 처리하는 대신, 자회사는 매각하여 고유의 업무를 계속 담당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single point of entry)과 그러한 파산 절차를 수행하기 위하여 사전적으로 지주회사가 충분한 ‘손실흡수력’을 확보하도록 규제하는 방안이 포함된다. 이를 통해 자회사들의 파산 위험을 실제 업무를 수행하지 않는 지주회사가 적절히 중화하여 짊어짐으로써 위험 분산 효과를 극대화하고, 타 지주회사 소속 금융기관들로 불똥이 옮겨가는 것을 막고자 한 것이다.
이번 실리콘밸리은행 사태에서도 이러한 규제가 정확히 적용되어 뱅크런이 일어난 실리콘밸리은행은 현재 매각절차를 밟고 있고, 모회사인 SVB파이낸셜은 파산절차에 들어갔다. 특히 연방예금보험공사가 예금자보호법에 의거해 예금을 보호해 주는 등 실리콘밸리은행의 고유 업무만큼은 최대한 신속하게 정상화하고자 한다. 여기까지는 금융안정이사회를 중심으로 주요국의 금융당국이 머리를 맞대고 노력한 결실이라 할 것이다.
파산처리 절차·손실 흡수력 규제 미흡
그러나 실리콘밸리은행은 보유 채권의 급속한 가치 하락으로 뱅크런이 야기되어 파산 위험이 수면 위로 부각되었으나, 아직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유동성 부족 문제로 속앓이를 하고 있는 다른 금융기관이 많이 있는 듯하다. 그래서 ‘실리콘밸리은행 사태’는 신속하게 정리되는 모습이지만, 더 넓은 의미에서의 ‘이번 사태’는 그 끝이 잘 보이지 않는다. 금융 시스템 전체가 급격한 유동성 감소 위험에 노출될 때, 개별 금융기관 처리 절차가 각기 효과적으로 작동할 수 있을지 우려된다. 일례로 실리콘밸리은행은 매각 절차를 밟고 있지만, 지금과 같은 유동성 감소 국면에서 매수 의사를 가진 금융기관을 찾기란 쉽지 않다.
우리 정부와 금융당국도 실리콘밸리은행 사태가 한국 경제에 끼칠 파장에 대하여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다만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은 과거 은행에 대한 구제금융과 정리절차 경험을 갖고 있음에도 우리는 아직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는 파산처리 절차와 손실흡수력 규제가 준비 중이라는 점이다. 특히 글로벌 스탠더드로 자리 잡은 방식(single point of entry)을 도입하기에는 여러 걸림돌이 존재한다. 과연 지주회사를 파산처리 대상 회사로 설정할 수 있을까 하는 근본적인 문제부터, 개별 금융기관이 발행한 다양한 종류의 채권과 개별 금융기관끼리 교차 보유한 채권의 해소 등 실행상의 문제들까지 어느 것 하나 쉬워 보이지 않는다. 더 나아가 우리 금융시장 규모를 감안하면 자회사 매각을 통한 정상화가 가능할까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외국계 자본에 매각한다면 헐값 매각 논쟁도 벌어질 수 있다. 실리콘밸리은행 사태의 파장을 감지하려는 노력 못지않게 그 처리 과정에 대한 연구도 시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