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의 창] 나는 언제 시골의 들길을 걸을 수 있을까?

입력 2024-07-12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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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주 시인

들길을 걷고 싶어 마음이 요동칠 때가 있다. 도시의 소음과 잡다한 소비활동에 염증을 느낄 무렵 들길에서 나만의 시간을 갖고 싶다. 마을 밖으로 이어진 들길에서 한 마리 야생 노루가 되어 서성여도 좋겠다. 들길은 하늘과 땅을 반으로 가른 채 저 멀리까지 뻗어 있다. 하늘엔 새매 한 마리가 원을 그리며 떠 있고, 들길 옆 강둑에는 플라타너스 나무가 껑충하게 서 있어도 좋겠다. 그 나무 그늘 아래 강물이 조요히 흐르고 제비는 공중에서 활공하는 중이다. 맨드라미가 피어 있고, 낮닭이 울며 홰를 치는 마을은 내 등 뒤에서 의연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머리가 마늘쪽같이 생긴 고향의 소녀와/한여름을 알몸으로 사는 고향의 소년과/같이 낯이 설어도 사랑스러운 들길이/있다//그 길에 아지랑이가 피듯 태양이 타듯/제비가 날듯 길을 따라 물이 흐르듯 그렇게/그렇게//천연(天然)히//울타리 밖에도 화초를 심는 마을이 있다/오래오래 잔광(殘光)이 부신 마을이 있다/밤이면 더 많이 별이 뜨는 마을이 있다”(박용래 ‘울타리 밖’)

나는 들길의 환대와 격려 속에서 소년시절을 보냈다. 그 뒤 들길을 등지고 도시로 나가 더 나은 삶을 위해 분투했다. 도시에서는 많은 인간관계들, 변덕스럽고 이기적인 인간들과의 거래, 휴대폰과 이메일, 연신 울려대는 카톡 같은 것이 나를 지배한다. 그러나 나는 고향의 들길에서 원초의 이타적인 인간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 광활한 하늘을 머리에 이고 대지에 서 있는 떡갈나무 같이 나는 옛날의 소년으로 돌아간다. 들길에서는 자연의 변화에 더 주의를 기울이고, 나 스스로에게 집중하며 숙고에 빠질 수 있다. 디지털 세상에서 여러 개의 자아로 쪼개진 나는 하나의 전체로 응집하며 잃어버린 자율성을 되찾는다.

들길은 영원의 향기를 맡게 하며 나를 중심으로 둥그렇게 감싼다. 내 안의 가능성을 탕진하고 궁핍감에 시달리던 나는 돌연 풍부해진다. 들길은 노동과 생산, 효율성을 채근당하는 시간이 아니라 휴식과 머무름, 고요와 사색의 시간을 만든다. 들길의 시간은 인간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신의 시간이다. 길의 시간은 느린데, 마치 강물처럼 천천히 흘러간다. 들길에서는 서둘 필요가 없다. 들길에서 느긋하게 걷다가 봉인된 존재의 비밀을 열어젖히면, 내 안의 고독, 느림, 노스탤지어 같은 것이 부끄러운 듯 드러난다.

나는 어쩌다 냉담과 냉소로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인간이 되었을까? 내가 들길을 등지고 떠나면서 자연과 조응하는 법을 잊은 탓이다.

들길에서는 평온이 날개를 접고 마음에 내려앉는다. 들길은 내 지치고 상처받은 마음을 위무해준다. 들길은 내 고독의 역량을 키운 장소다. 아, 잊었구나, 나의 뼈를 키우고 피를 단련시킨 건 외할머니와 외삼촌들, 고즈넉한 들길과 수숫대를 흔들며 지나는 바람이었음을! 시골 마을과 들길, 그리고 길가에 뒹굴던 돌들과 잡초, 똬리를 틀고 있던 뱀들도 나를 무상으로 양육했다. 내 양육자들에게 깊이 감사드린다. 시골은 내 운명의 원소 중 하나다. 주말에는 발목이 시큰거리도록 오래 들길을 걸어보자. 들길에서 시간을 보내며 내 안에서 추방된 들길의 고요, 평화, 느림을 되찾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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