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만큼 토요타의 내면에는 그들의 현재와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다양한 이면이 존재하기도 한다.
2010년 오늘, 완성차 메이커 가운데 차 팔기가 가장 어려운 회사임에도 불구하고 토요타는 시나브로 이전의 명성을 회복하고 있다.
전미 자동차 노조를 등에 업은 오바마 정부의 도를 지나친 '오버' 속에서도 다시금 옛 영광을 위해 조심스러운 행보를 이어가고 있는 토요타의 내면에는 1세기 가까이 이어온 그들의 저력이 뒷받침됐기 때문이다. 다시 뛰는 토요타에 관심이 모아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우리가 모르고 있던 토요타의 내면에는 다양한 모습이 담겨있다. 먼저 토요타는 ▲발명가에 의해 창립된 자동차 회사 ▲최초 방직기를 개발하던 자동차 회사 ▲독일차 기술을 최초로 전수받았던 일본차 회사 ▲여러 차에 '왕관'이라는 이름을 부여한 자동차 회사 ▲오래전부터 고졸 임원을 배출한 자동차 회사 ▲한국전쟁 때 미군으로부터 군수차량 제작을 요청받아 한국에 군용트럭을 보냈던 자동차 회사 ▲그리고 여전히 우리가 보고 깨닫지 못하는 사이 무너지지 않을 저력을 쌓아온 자동차 회사다.
토요타의 시작은 창업주이자 이름난 발명가인 '사키치 토요타'의 손에서 시작한다. 청년 토요타는 무엇이든 손에 넣으면 이전에 없던 새로운 기계를 뚝딱 만들던 재주꾼이었다.
그러나 그 자신조차 훗날 자신이 만든 회사가 세계 최대의 자동차 회사가 되리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었다.
마침내 1935년 토요타 최초의 자동차인 A1이 출시됐고 그보다 2년이 더 지난 1937년에서야 토요타자동차가 독립하기에 이르렀다. 당시만해도 토요타의 중심은 여전히 자동방직기계였던 시절이다.
우리가 토요타에 대해 모르고 있던 사실 가운데 하나가 토요타의 한국전쟁 참전이다. 1950년 6월 한국땅에서 남과북이 이념을 사이에 두고 서로에게 총구를 겨눴을 때 토요타는 미군의 요청에 따라 군용트럭을 생산했다. 토요타의 군용트럭은 한국땅에서 미군을 지원해 적과 맞서기도 했다.
2차 대전과 한국전쟁에서 대량생산의 노하우를 익힌 토요타는 마침내 1955년 독자기술로 완성한 '크라운'을 선보인다.
크라운은 현재 아우디의 전신인 아우토 유니온과 폭스바겐, 포르쉐 등 굵직한 독일차들의 노하우를 가져와 만든 차였다. 당시까지 개량형 미국차만을 생산하던 토요타에게 독일차 노하우는 다양한 기술개발의 가능성을 점쳐볼 수 있는 계기였다.
우리나라 자동차 산업이 일본 차산업에 영향을 받았듯 일본차 역시 개발 초기에는 독일 자동차 기술을 고스란히 들여와 차를 개발했었다.
토요타는 일본에서는 호평을 받은 기념비적 모델 크라운을 필두로 자사의 중심 모델에 왕관이라는 이름을 붙여오고 있다. 중형차 코로나(CORONA)는 라틴어로 왕관을 의미한다. 소형차 베스트셀러 코롤라(COROLLA) 역시 라틴어로 '작은 왕관'을 의미한다.
우리가 여전히 간과하고 있는 것 가운데 하나가 토요타의 저력이다. 2차대전 이후 경기침체를 대량생산 시스템으로 극복하고 석유파동 때에는 연비 좋은 소형차로 전략을 수정했다.
2010년 전 세계 자동차 메이커 가운데 가장 차를 팔기 어려운 메이커 가운데 하나가 됐으나 그들은 여전히 숨겨둔 저력을 과시하고 있다. 2008 리먼쇼크 이후 전세계 자동차 업계가 침체기에 빠졌고 연이은 제작결함과 이에 대한 미국 정부의 도를 넘어선 대응 속에서도 2년여 만에 흑자로 돌아서며 감춰둔 저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토요타가 다시금 화려한 옛 영광을 위해 부활을 꿈꾸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토요타를 찾고 있고 여전히 토요타의 공급은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냉철한 이성보다 뜨거운 감성을 쫓는 것이 바로 우리의 본능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