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섭게 강추위가 몰아치던 지난 1월, 명동의 한 건물 앞에서 한가롭게 신문을 읽거나 아예 길바닥에 드러누워 잠을 청하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한 상인이 장사에 방해된다며 갑작스레 벤치 쪽으로 가서 고성을 지르더니 이내 험악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그러자 확성기를 든 한 여성이 ‘나쁜 일은 음악으로 털어버리자’고 외치자 벤치에 앉아있던 사람들과 주변 행인들이 주머니 속에서 스마트폰과 태블릿PC를 꺼내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드라마나 영화 속의 장면이 아니다. 실제로 지난 1월 15일 명동 한 복판에서 진행된 ‘스마트폰 게릴라 콘서트’의 한 장면이다. 약 110만명의 회원수를 자랑하는 스마트폰 동호회와 창작 댄스팀이 마련한 이날 공연은 일반적인 악기가 아닌 스마트폰 어플리케이션을 이용해 음악을 연주했다.
약 20여분 남짓한 짧은 공연이었지만 길 가던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스마트폰 등 스마트기기에 익숙한 젊은 층들은 스마트폰 공연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채고 자리를 함께 했으며, 장년층들은 스마트기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사실감 있는 악기소리에 놀란 반응과 함께 흠뻑 빠져들었다.
스마트폰, 태블릿PC 등 모바일 IT기기가 본격적으로 활성화되자 IT 업계에서 마니아층의 영향력은 점점 강해지고 있다. 블로그·트위터나 페이스북 같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가 활성화되면서 인터넷을 통해서도 그들의‘입소문’이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 IT업계의 트렌드는 취미나 취향이 비슷한 사람, 자발적 참여자로 구성된 소비자 마니아층이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 이들의 의견은 상품 개발에까지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기본적으로 이들의 구매 목록 1순위는 무조건 자신들이 좋아하는 회사의 브랜드다. 신제품이라도 출시되는 날이면 매장 앞에서 하루, 이틀 정도 밤새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회사에 가고, 학교에 등교하는 것보다 신제품을 갖는 일이 우선시 될 정도다.
국내에서도 애플의 마니아층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아이팟과 아이맥부터 시작된 애플의 마니아층은 아이폰으로 절정에 이르렀다. 이들은 IT 제품에 대한 일종의 ‘팬덤’ 현상으로까지 불리며, 매년 새로운 제품을 구입하고 포럼 사이트 방문을 비롯, 애플 로고가 새겨진 티셔츠를 입고 다닐 정도로 제품에 대한 애정이 깊다.
주요 인터넷포털에 개설된 아이폰 관련 카페만 해도 네이버의 경우 400개가 넘고 최대 카페는 회원수가 50만명에 육박하고 있다. 다음도 300여개의 카페에 최대 카페 회원수가 13만명을 넘어섰다.
특히 아이폰 지지자들은 기존 IT 기기 애호가처럼 폐쇄적인 마니아 집단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주변 지인들에게 아이폰의 우수성을 전도할 정도로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기까지 한다.
최근 아이폰과 갤럭시S, 그리고 아이패드와 갤럭시탭. 스마트폰과 태블릿PC 분야에서 세계 최고 기기 자리를 놓고 애플과 삼성전자가 팽팽한 대결을 펼쳐지면서 온라인 세상에서도 네티즌들의 공방이 뜨겁다. 이들은 갤럭시S와 아이폰4의 성능에 대해 설전을 벌이는 모습까지 보인다.
특이한 점은 ‘애플빠’에 반대하는 이른바 ‘삼성빠’가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삼성빠들은 삼성전자가 불과 2년 만에 아이폰4를 위협할 만한 제품을 내 놓은 만큼 그 기술력을 인정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아직까지 한국 기업에 충성심을 보여주는 마니아들은 그리 많지 않다. 자신들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회사의 제품을 조금이라도 헐뜯는 댓글이라도 보이면 곧바로 전투모드(?)로 돌입할 만한 충성심 높은 지원군이 아직 형성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근래 LG전자 휴대폰 사업의 부진은 스마트폰 시장에서의 부진에서 기인한다. 스마트폰 시장에 대한 LG전자의 과소평가는 스마트폰 제품 개발에 대한 신속성 결핍으로 이어졌다. 떨어진 신속성은 라인업 부족으로 이어졌다. 악순환이 이어졌다. 다시말해 스마트폰 시장은 ‘일부 마니아의 시장에 불과하다’는 인식에 시기를 놓쳐버린 것.
이처럼 확실한 보증수표로 통하는 IT 마니아들의 미치는 힘이 강해지면서 최근 기업들도 마니아층 활성화에 적극적이다.
올림푸스한국의 미러리스 카메라 ‘펜’(PEN)의 열성 사용자들인 ‘페니아’(PENia)는 일본의 올림푸스 본사에서 직접 챙길 정도로 열의가 대단하다. 그들은 올림푸스와 매뉴얼 책을 내놓기도 하고 올림푸스의 상품 개발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지난해 스마트폰 시장이 본격적으로 활성화된 것도 입소문이 주요 요인이었다는 점에 업계의 이견이 없다”며 “스마트폰을 직접 사용해 본 블로거들이 사용의 편리성을 인터넷에 올리면서 시장이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는 “혁신적이고 트렌디한 이미지에 열광하는 소비자 커뮤니티와 그를 통한 입소문이 시장 판도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며 “이제는 성능 뿐만 아니라 소비자가 원하는 이미지, 스타일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것이 성공의 필수 요소가 됐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