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뜰주유소로 분열된 주유업계= 주유업계는 현재 분열 양상을 보이고 있다. 정부의 알뜰주유소 때문이다. 한 쪽에선 정부 정책인 알뜰주유소를 ‘꼼수’라고 비난하고 있는 반면 다른 한 쪽에선 적극 참여를 독려하고 있다. 같은 주유업계끼리 비난이 오가는 상황이다. 심지어 ‘제2 알뜰주유소 설립’ 얘기까지 나돌고 있어 일선 주유소 업자들은 혼란스러워 하고 있다.
한국주유소협회는 최근 알뜰주유소를 비난하는 강경한 성명서를 발표했다. 협회 측은 “알뜰주유소는 유류세 인하 여론을 무마하기 위한 정부의 꼼수에 불과하다”며 정부를 강하게 비난했다. 정부가 폐업률이 증가하고 있는 주유소들의 실상은 외면하고 헌정 사상 유례없는 반시장 정책만 고집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반면 1000여곳의 자영주유소들이 가입해 있는 한국자영주유소연합(구 SK자영주유소연합) 측은 반대 입장이다. 알뜰주유소가 확산되면 정유사들의 경쟁도 촉진돼 기름값 안정에도 긍정적인 영향이 있을 것이란 주장을 펼치고 있다. 오히려 한국주유소협회 측이 정유사들에 포섭돼 업계의 입장을 대변하지 못하고 있다고 노골적으로 비난하고 있다.
실제 이들 단체는 최근 한국석유공사와 알뜰주유소 확산에 동참한다는 내용의 양해각서(MOU)까지 체결했다. 또 한국글로벌에너지란 석유유통회사를 설립, 자체적으로 ‘제2 알뜰주유소’까지 만든다고 공언했다.
이 같은 주유소업계의 분열 양상에 일선 주유소 업주들만 혼란스러워 하고 있다. 한 주유소 업주는 “고유가의 주범으로 주유소들이 표적이 되고 있는 가운데 정부 알뜰주유소 정책이 주유업계를 분열시키고 있다”라며 “이런 식으로 주유업계가 자꾸 이슈화돼 상당히 난감하다”고 우려했다.
정유업계 관계자도 “큰 실효성은 없어 보이지만 현 시점에서 자꾸 알뜰주유소 등 이슈를 부각시키고 있는 것 자체가 문제”라며 “알뜰주유소가 정유업계 뿐만 아니라 주유업계에도 큰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알뜰주유소의 휘발유 판매가격은 일반 주유소와 별 차이가 없거나 오히려 비싼 경우까지 생겨나고 있다. 알뜰주유소를 통해 리터당 최대 100원까지 유가를 낮추겠다는 당초 취지가 무색해진 상황이다.
서울지역 1호 알뜰주유소의 보통 휘발유가격은 리터당 2057원. 취지대로면 알뜰주유소가 주변 주유소들보다 저렴해야 하지만 오히려 반대가 됐다. 알뜰주유소가 인근 주유소들에 비해 약 20~30원 가량 비쌌다. 실효성 논란이 일고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한 주유소 업주는 “실효성도 없는 알뜰주유소 때문에 3~4%의 마진을 얻는 주유소들만 고생하게 됐다”며 “주유소 업자들도 자영업자들인데 왜 무시하는지 정부의 속내를 잘 모르겠다”고 하소연했다.
올들어 정부는 알뜰주유소에 이은 각종 유가 인하 정책들을 쏟아내고 있다. 석유제품 현물전자상거래소(이하 석유거래소), 혼합석유 확대 등이다. 하지만 여전히 정유·주유업계의 분위기는 싸늘한 상황이다.
석유거래소는 주식을 거래하듯 공급자(정유사)와 수요자(주유소)들이 호가에 따른 경쟁매매 방식으로 석유제품을 거래하는 게 골자다. 정부는 다수의 공급자가 경쟁을 통해 가격을 결정하는 만큼 유가가 하향평준화 될 것으로 기대하는 눈치다.
하지만 매도자 입장인 정유업계는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SK이노베이션, 현대오일뱅크 등 정유사 관계자들은 “시장 상황을 보고 실제 참여는 나중에 결정할 것”이라며 거래를 미루고 있는 상황이다. 실제 지난달 30일 공식 오픈한 석유거래소는 지난 2일까지 단 한 건의 거래만 성사되는 등 부진한 실적을 면치 못하고 있다.
정유업계 한 관계자는 “경쟁매매 방식 때문에 정유사들 입장에선 기존의 가격구조를 깰 수 있다는 우려가 크다”면서 “솔직히 정부 정책이라는 점에서 마지못해 참여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밝혔다.
정부는 주유소들의 석유거래소 참여를 위해 혼합석유(여러 정유사에서 공급받은 석유를 섞어 파는 것)를 확대할 수 있는 제도를 도입하기도 했다. 주유소 월 판매량의 20%까지 혼합석유를 판매할 수 있도록 하는 게 골자다. 이는 브랜드폴 주유소들이 정유사들과 전량구매계약 관계에 있어 석유거래소에 참여하지 못한다는 점을 보완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이것 역시 실효성이 문제다. 특히 주유소들 입장에선 타 정유사 제품을 구매하면 기존 계약 정유사들로부터 불이익을 당할지 모른다는 우려가 크다.
한 주유소 업자는 “가격이 크게 싸지 않은 이상 굳이 타 정유사 제품을 구매해 분란(?)을 일으킬 필요가 있겠느냐”며 “정부가 핵심(유류세)를 비껴간 자잘한 정책들만 내놓고 있어 국민들이나 주유업계 모두 이를 외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정유업계 관계자도 “가격 인하 효과 보다는 가짜 석유 유통이 늘어나는 부작용이 더 클 수 있다”며 “무엇보다 정유사들의 경영 전략을 뒤흔들겠다는 것과 같다”고 불만을 표시했다.
한국주유소협회도 최근 성명서를 내고 정부의 유류세 인하를 강력히 주장했다. 협회 측은 “최근 고유가 원인은 기름값의 46%에 달하는 유류세 때문”이라며 “진정한 고유가 대책은 모든 국민에게 혜택이 돌아갈 수 있는 유류세 인하 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협회에 따르면 현재 유류세를 40% 인하하면 리터당 200~300원의 유가 인하 효과를 거둘 수 있다. 고작 10~20원 인하 효과 뿐인 알뜰주유소보다 실질적인 인하 혜택을 얻을 수 있다는 얘기다.
납세자연맹도 지난달 말 ‘유류세 불공정 폭로’ 기자회견을 갖고 유류세 인하를 거듭 촉구했다. 서민들이 소득의 13%를 유류세로 내면서 큰 부담을 짊어지고 있다는 주장이다.
납세자연맹 김선택 회장은 “2010년 기준 유류세 세수는 국세 수입의 14%인 25조원을 차지했는데, 이는 근로소득세 16조원 보다 9조원이나 많은 액수”라고 주장했다. 현재 납세자연맹이 온라인을 통해 진행 중인 유류세 인하 서명 운동에는 약 2만2000명이 참여하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정유업계 관계자도 “정부도 이제 정유사에 협조만 구할 게 아니라 뭔가 해야하지 않겠느냐”면서 “정부 스스로도 고통을 분담해야 한다. 언제까지 ‘유류세 인하’를 검토만 하고 있을 것인지 모르겠다”고 꼬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