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아마도 대중문화와 연예인을 바라보는 미국과 우리나라의 차이 때문일 게다. 미국에서는 대중들을 웃고 즐겁게 만드는 엔터테이너를 심지어 아티스트로 바라본다. 물론 국내에서도 그 시각이 달라지고 있지만, 아직까지도 엔터테이너를 속칭 딴따라로 비하해 보는 시각은 여전히 남아있다. 열정적으로 노래하고 춤을 추고 또 토크쇼 같은 데 나와서는 관객들을 빵빵 터트리게 하는 그 끼는 싸이를 대단히 쿨한 존재로 인식시켰다.
이런 문화적 차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가 바로 이번 김기덕 감독으로 하여금 황금사자상을 거머쥐게 한 ‘피에타’다. 베니스에서의 열광적인 환호 덕분에 국내에서도 어느 정도 흥행에 성공했지만 이 영화는 여전히 국내 관객들에게는 김기덕 감독 특유의 불편함과 잔혹함으로 읽히는 경우가 많다. 왜 한쪽에서는 열광적으로 박수 받는데, 우리에게는 불편한 영화로만 보이게 될까.
여기에는 ‘피에타’를 보는 서구의 시각과 우리의 시각의 차이가 존재한다. 즉 기독교적 전통 속에서 서구가 바라보는 ‘피에타’란 심지어 종교적으로 느껴지는 죄와 구원의 이야기다. 자식을 잃은 상실감에 모성을 통해 복수를 하는 조민수는 성모의 재해석이고, 극중 인물들이 쏟아내는 “불에 타 죽을 것이다”라는 저주는 묵시록의 예언을 연상시킨다. 도시를 피로 선 그어버리는 인상적이면서도 끔찍한 엔딩 신은 피로 씻어내는 중세적인 종교적 구원을 떠올리게 한다. ‘피에타’는 이처럼 서구의 입장에서는 완벽한 저들의 이야기로 변용되어 수용된다.
김기덕 감독은 이 작품을 자본주의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담은 작품이라고 스스로 밝혔지만 그것은 우리의 시각이 더 많이 들어간 해석이다. 청계천이라는 점점 자본의 논리에 의해 사라져가는 공간과 그 속에서 손이 잘려나가는 노동자의 이야기는 자본주의 이면의 끔찍한 실체를 우리의 눈앞에 들이미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이것은 원거리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작금의 양극화라는 그림을 근거리에 포착함으로써 드러낸다. 우리들은 아마도 이 보기 불편한 진실을 ‘피에타’를 통해 보았을 것이다.
미디어 환경에 의해 점점 지구촌화되면서 문화는 국가와 민족을 넘어서 교류되고 소통된다. 하지만 그 과정을 보면 제대로 된 의미에서의 소통이라기보다는 자신들의 시각에 의해 해석된 소통인 경우가 많다. 즉 이 언어와 문화의 차이로 인해 실제 뜻과 내용과 상관없이 저들에 의해 마음대로 오해되고 곡해되고 때로는 재해석되는 그 과정은 어쩌면 소통으로 가는 하나의 과정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런 소통의 과정을 이해한다면 싸이의 ‘강남스타일’이나 김기덕 감독의 ‘피에타’ 같은 작품을 기획을 통해 만들어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문화는 기획되는 게 아니라 거의 우연에 가깝게 창발(創發)된다. 그만큼 아티스트의 개성과 역량이 절대적인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