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경영 환경 속에서 총수의 지배 고리를 끊어 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계열사의 경영을 독립시키고 각사 최고경영자(CEO)에게 그룹의 중요 의사결정 권한을 부여한다는 것은 그만큼 총수(지주회사)의 고유한 지위가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최 회장은 자신이 그리고 있는 SK의 미래 청사진에 어울리지 않는다면 지배구조의 기본적인 틀까지도 과감히 도려낼 생각이다.
◇“스스로 결정하고 추진하라”= 내년 1월부터 시행되는 SK그룹의 새로운 운영체제인 ‘따로 또 같이 3.0’의 정의는 ‘계열사의 독립경영’으로 요약된다. 전문경영인이 조직력과 개인 역량을 최대한 끌어올려 모든 것을 자율적으로 결정해 추진하라는 것이다. CEO의 권한이 커지는 만큼 무거운 책임도 뒤따른다.
SK그룹은 계열사별 경쟁은 강화하되 기업문화와 브랜드가치를 공유하는 ‘따로 또 같이’라는 경영구조를 채택해 왔다. 지난 2002년 이른바 ‘제주선언’인 이사회 중심의 ‘따로 또 같이 1.0’을 시작으로 현재는 지주사 체제인 ‘따로 또 같이 2.0’을 유지하고 있다.
SK는 지난 9월부터 ‘따로 또 같이 3.0’ 도입 논의를 시작했다. 이후 10~11월 두 차례에 걸친 CEO 세미나를 통해 실행 계획을 확정했다. ‘따로 또 같이 3.0’은 계열사의 독립경영과 위원회 기능 강화가 핵심 골자다. 각사의 CEO와 이사회는 독립적으로 의사 결정을 하게 된다. 또 자율적으로 위원회에 참여해 그룹 차원의 글로벌 성장에 힘을 보태게 된다. 지주회사인 SK(주)는 계열사에 관여하지 않고 신규 사업 개발 등 기업가치 제고 중심으로 업무 영역이 재편된다.
◇상위 그룹인 위원회 기능 강화로 ‘또 같이’= 신경영체제의 또 다른 축인 위원회는 그룹 운영의 객관적인 장점만 살리는 ‘또 같이’ 전략을 대표한다.
SK는 작년부터 시범적으로 위원회 시스템을 가동해 왔다. 최재원 수석부회장 등 6명으로 구성된 원로 부회장단을 창설하고 △글로벌성장위원회 △커뮤니케이션위원회 △인재육성위원회 △전략위원회 △윤리경영위원회 △동반성장위원회 등 6개 위원회를 운영해 왔다. 이중 글로벌성장위원회는 최태원 회장이 직접 챙기고 있으며, 나머지 5개 위원회는 김신배·정만원 부회장 등이 각각 위원장을 맡고 있다.
‘따로 또 같이 3.0’에서는 그룹 단위의 운영을 각 위원회가 전담한다. 또 위원회에 참여한 계열사 CEO는 △위원장 추천(결정은 수펙스추구협의회) △위원회 안건 상정 △안건 동참여부 결정 등 실질적인 운영을 책임지게 된다.
SK 관계사 최고경영자(CEO)와 주요 임원의 인사 권한도 위원회로 넘어가게 된다. 각 위원회에서 CEO를 평가하면 인재육성위원회의 검토 후 관계사별 이사회가 최종 확정하는 구조로 완전히 바뀐다. SK는 각 위원회의 인선 작업을 정기인사와 함께 내년 초 마무리할 계획이다.
◇최태원 회장의 계속된 경영실험 = 최태원 SK 회장은 다양한 각도에서 ‘따로 또 같이 3.0’을 바라보고 있다. 신경영체제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한 최적의 조건을 찾기 위해서다.
최 회장은 우선 그룹 단위의 의사결정에 일절 관여하지 않기로 했다. 당초 최 회장은 ‘따로 또 같이 3.0’에서 지주사의 권한을 이양받은 6개 위원회 중 글로벌성장위원회를 지속적으로 맡아 신성장동력 발굴을 주도할 계획이었으나 마음을 바꿨다. 그룹 내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수펙스(SUPEX)추구협의회 의장직에서도 물러나 기존의 영향력을 그대로 행사한다는 불필요한 오해도 사지 않기로 했다. 이 모든 것이 신경영체제 도입 취지를 해치지 않기 위해 내린 결단이다.
내년부터 그룹 내 핵심조직으로 운영될 위원회도 여전히 수술대에 올려놓고 있다. 위원회 운영의 객관성과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해외를 포함한 외부 인사를 일부 영입하는 방안을 고려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위원회도 당초 6개에서 5개로 줄이는 것을 검토 중이다. 기업 상생 업무를 담당할 동반성장위원회를 윤리경영위원회로 편입시켜 소위원회 형태로 활동하도록 판을 새로 짜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