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피가 줄줄 흐르는 와중에도 흔들림 없이 공연을 마치신 이순재 선생님. 아직까지도 심장이 덜덜 떨린다. 커튼콜 뒤 선생님 눈가에 맺혔던 눈물이 내 심장에 영원히 머물 것 같다.”연기자 정선아가 지난 4월 22일 트위터에 올린 글이다. 연극‘아버지 ’공연 도중 세트에 부딪혀 이순재는 많은 피를 흘렸고, 정선아 등 연기자들은 연극을 중단하고 흐르는 피를 닦아주려 했지만 극의 흐름과 관객의 몰입을 방해해서는 안된다며 피를 흘리며 연극을 끝까지 마쳤다. 그리고 연극 때 부상당한 눈에 반창고를 붙인 채 MBC 드라마 ‘더킹 투하츠’ 에서 열연을 펼쳤다. 바로 이런 모습에 이순재가 56년 동안 연기자로서 정상의 자리를 지키며 롱런할 수 있는 비결이 담겨 있다. 이순재는 늘“드라마 현장에서 먼저 촬영을 요구하는 등 특별대우를 바라지 않는다. 촬영장에 가면 동료 연기자일 뿐이다”고 말한다.
고등학교 시절 연극에 맛을 들여 대학 연극반(서울대)에 들어가 활동을 하면서 연기를 평생의 업으로 삼은 이순재는 1962년 KBS개국 기념 작품인‘나도 인간이 되련다’를 통해 탤런트로 데뷔한 이후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 연극 활동을 하면서 정상을 일궈왔다.
이처럼 고등학교 때부터 연극을 시작해 연기자로서 일가를 이룬 비결은 철저한 자기관리와 함께 연기의 꾸준한 업그레이드다. “녹화 현장에 가면 항상 가장 먼저 나와 있는 사람이 이순재씨다. 작품 분석이 잘 안 돼 대사나 연기가 정리되지 않으면 될 때까지 연기 준비를 철저히 한다. 자신이 완벽하게 준비가 될 때까지 입도 열지 않는다. 그러면서 연기가 업데이트된다. 연기에 낡은 구석이 없다.
늘 변신을 시도하기 때문에, 한마디로 질리지 않는 배우다.”‘허준’‘상도’‘이산’‘마의’등 수많은 작품을 함께한 이병훈 PD의 말에서 이순재가 최고의 자리에서도 끊임없이 자기 혁신을 통해 정상을 유지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오랜 세월 빼어난 연기력과 캐릭터 창출력으로, 그리고 끊임없는 연기 변신으로 수많은 시청자에게 명품 연기자라는 입지를 지켜온 것이다.
이순재가 얼마나 연기 혁신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지 느껴지는 대목이다. 뛰어난 연기력, 철저한 자기관리와 자기혁신, 그리고 또 하나가 이순재를 56년 동안 최고의 자리에 있게 해준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김병욱 PD가 ‘거침없이 하이킥’의 야동을 보는 장면을 연출할 때 그랬어. 이건 좀 아니다 싶어 이야기했지. 너무 튀고 과장된 것이 아니냐고. 그런데 김병욱 PD가 상세하게 상황을 설명하고 변화된 시청자의 정서를 말해주더군. 처음 나와 입장이 달랐지만 결과적으로 김PD가 옳다고 생각했어. 그것이‘야동순재’의 탄생 비결이야.”
중견 연기자 이순재가 최고의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던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연출자나 감독과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 자신이 애초에 생각했던 연기 스타일이나 연기의 문양을 과감하게 변화시킨다는 것이다. 톱스타나 연기를 오래한 중견 연기자 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드라마나 영화를 촬영할 때 연출자나 감독의 지시에 따르지 않고 자신의 연기만을 고집한다. 하지만 이순재는 그렇지 않다. 영화‘굿모닝 프레지던트’의 장진 감독은 “나와 생각이 다른 부분이 있을 것 같아 걱정했지만 대화를 나눠보니 이순재씨는 건전한 보수였다. ‘대통령이 이럴 때는 이렇게까지 안 한다’며 조언을 많이 해줬고, 나의 입장을 많이 수용해줬다”고 말했다. 이병훈 PD 역시 “이순재씨는 언제나 겸손한 태도로 남의 의견에 귀를 기울인다. 배우들은 연기를 하면서 작품에 대한 해석이 달라 종종 충돌하는데, 이럴 때 이순재씨는 결코 자신의 주장만을 내세우는 법이 없다. 물론 자신의 생각이 옳으면 끝까지 밀고 나가지만 감독의 이야기가 맞다 싶으면 그 자리에서 인정하고 겸허하게 받아들인다”고 했다.
77세 원로배우 이순재는 말한다.“대사 암기력에 문제가 생겨 NG를 반복적으로 내 다른 연기자에게 피해를 주는 그때가 은퇴할 시기”라고. 연기에 대한 뜨거운 열정으로 나이라는 물리적 시간을 무력화시키고 삶은 시간의 장단의 문제가 아니라 치열함의 문제라는 것을 온몸으로 보여주며 브라운관에서, 스크린에서, 그리고 무대에서 천의 얼굴을 연출하는 연기자 이순재는 최고의 연기자로서 여전한 현재진행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