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는 우리나라가 국민소득 2만 불에서 4만 불로 가기 위해선 복지확대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한다. 단기적으로는 복지확대로 성장률이 떨어진다 해도 중장기적으론 복지가 성장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최근 기자와 만난 장 교수는 ‘성장을 위한 복지론’을 강조했다. 그는 정부가 ‘증세 없는 복지’ 기조를 수정하고, 복지 수준과 재원마련 방안 등에 대한 장기 전략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부의 세제개편안에 ‘중산층 증세’란 반발이 일었다.
“복지지출 수준과 재원마련 방안 등 장기적 전략에 대한 합의가 없어서다.
예로 우리가 복지지출을 앞으로 30년 동안 어느 수준까지 올리고 이를 위해 세금은 대략 이런 식으로 올린다는 국민적 합의가 있으면 된다.
이번에 정부가 차라리 ‘물의를 일으켜 죄송하지만 기본적으로 합의구조의 문제다. 이를 계기로 국민 전체가 앞으로 1년, 2년이든 시간을 두고 우리의 30, 40년 후 복지를 어떻게 할지 얘기해보자’ 이렇게 말했으면 좋겠다.
‘증세없는 복지’는 기껏해야 4,5년 얘기지 장기적으로는 말이 안 된다. 노령화만 고려해도 복지지출이 GDP(국내총생산) 대비 1,2% 늘어서는 해결이 안 된다. ‘증세 없이 복지’ 프레임은 장기적 비전을 포기한 것이다.”
△법인세 인상이나 세출 조정 없이 근로소득세만 손본 데서 국민들 불만이 있는 것 같다.
“복지와 세금에 대한 개념 정립부터 확실히 안 되어 있어 그렇다. 세금은 정부가 어디다 묻어버리든지 태워버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애들이 다니는 학교고 내가 늙으면 받을 연금이고 내가 차 타고 다니는 길이다. 세금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잘 쓰는가를 감시해야지 세금 절대량이 중요한 게 아니다.
우리나라 공공복지 지출은 GDP 대비 10%로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꼴찌 수준이다. OECD 평균은 22%, 선진국 평균은 25%이다. 북유럽 국가들은 30%가 넘는다. 그나마 미국은 20%로 낮지만 사적인 복지 지출까지 더하면 30%가 된다. 결국 그만큼 결국 써야 한다는 얘기다. 개인이 각자 저축하고 노후·교육보험에 들 건지 아니면 온 국민이 돈 모아 사회보험을 패키지로 공동구매할 건지 그 선택이다.
복지하는 나라마다 어떤 나라는 넓고 얇게, 어떤 나라는 좁고 깊게 커버해준다. 어떤 것이 맞다고 딱 말할 순 없고 이는 논의해봐야 하지만 기본적으로 오른쪽 주머니에 돈 넣고 쓰느냐 왼쪽 주머니에 돈 넣고 쓰느냐 그 얘기다.
내 전공이 산업정책이라 창조경제 이런 걸 얘기해야 하는데 지금 복지문제가 너무 급해서 전공이 아닌데도 만날 복지, 복지 얘기한다.”
△세무비리 등 투명성이 부족하다는데서 국민 불신도 있다.
“투명성과 효율성이 있어야 한다. 상층부가 조세도피처도 쓰면서 탈세하는 것부터 막아야 한다. 투명성·효율성 없이 자꾸 불공평하게 느껴지니까 이번 세법개정 과정에서도 ‘부자들은 다 돈 빼돌리는데 왜 우리만 때리느냐’ 이렇게 된 것이다. 정부도 어느 정도 정지작업을 해놓고 발표했어야 하는데 너무 별개로 생각했다.”
△저성장 속에 복지가 늘면 더 부담이란 걱정도 있다.
“1,2년으로 보면 R&D(연구개발) 투자할 돈을 복지에 갖다 쓰면 성장률이 떨어질 것이다. 하지만 1,2년이 아니라 30년을 놓고 보면 복지를 하는 것이 성장에도 도움이 된다.
나는 원래 성장주의자이고 성장이 진짜 중요한데도 복지를 얘기하는 건 복지를 제대로 안하면 성장에 걸림돌이 되는 시기가 왔기 때문이다.
예로 옛날엔 기술이 단순해서 신발공장에서 일하다 2,3주 재교육을 받으면 봉제공장에서 일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단시일 내 사양산업이 될 조선산업 사람들이 전망 좋은 생명공학이나 반도체 쪽에 가서 일하겠다고 하면 적어도 2,3년 재교육을 받아야 한다. 그 사람들이 재교육 받을 동안 서포트해주지 않으면 그 인력들은 역사의 쓰레기더미로 가는 것이다. 그 사람들한테도 할 수 없는 일이고 나라경제를 위해서도 낭비다.
우리나라는 사회적 안전망이 잘 돼 있지 않아 젊은이들이 도전을 못한다. 의대 집중현상으로 표현되는 젊은이들의 직업선택 보수화 문제가 있다. 우리나라가 4만 불짜리 나라가 되려면 머리 좋은 친구들이 공대도 많이 가서 첨단기술 개발해야 한다.
그리고 계층상승이 안되는 사회동맥경화 현상을 해결하기 위해서도 복지가 필요하다.
상위 20%에 속하는 부모의 자녀도 상위 20%에 속할 확률, 이런 식으로 계층이동성을 따져보면 복지가 잘 돼 있는 북구국가는 부모계층과 자식계층 상관관계가 0.2 정도 밖에 안된다. 하지만 복지가 상대적으로 잘 안되어 있는 포르투갈, 미국, 영국은 0.8 가까이 된다.
제가 대학 다니던 80년대 초엔 서울대 경제학과에 지방 출신이 70%였는데 요새는 강남 출신이 70%다. 순환이 그만큼 안 되고 있다는 것으로, 사회를 좀 더 자극하고 건강하게 만들기 위해서도 복지가 필요하단 의미다.
무엇보다 가장 큰 충격파로 올 수 있는 것이 출산율 저하, 고령화 문제다. 여성들이 원한다면 자유롭게 일할 수 있도록 탁아시설 등을 통해 지원하고, 자신이 원하면 파트타임으로도 일할 수 있게 고용제도를 만들어 줘야 한다. 그런 제도 없이 앞으로 30,40년 후 되면 우리나라는 인구의 20%가 인종적으로 한국인이 아닌 나라가 된다. 저는 그것이 좋다고 생각하고 저도 이민노동자이지만, 이를 의식적으로 선택하는 것과 떠밀려하는 건 다르다.
이러한 여러 문제들을 우리가 지금 풀지 않으면 2만 불짜리 나라에서 4만 불짜리 나라로 갈 수 없다.”
△성장률 둔화가 이어지고 있다.
“외환위기 이후 우리 경제 틀이 저성장체제로 바뀌었다.
금융자유화되니 망할 위험이 있는 기업엔 돈을 꿔주지 않는다. 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은행대출의 90% 정도가 기업대출이었는데 지금은 적은 데는 30,40%다. 대기업은 유보자금이 많아져 필요없다고 할지 몰라도 중소기업은 돈을 찾을 수 없다.
우리나라가 지금 제일 떨어지는 게 중소기업 분야다. 무역구조상 가장 큰 적자원인이 기름수입, 부품소재 산업이다. 다른 데서 돈 벌어다 기름 사고 부품 사오는 걸로 다 쓴다. 우리가 일본, 독일, 미국 같은 나라를 따라잡으려면 부품소재 산업을 개발하지 않으면 안되는데 이건 기술성질상 중기업종이다. 그런데 중소기업에 자금이 마르니까 개발이 잘 안된다.
자본시장 개방하고 자유화하면서 기업들이 자꾸 단기 이윤 위주 경영의 압력을 받아 산업구조의 업그레이드가 안되는 점도 있다.
길게 보면 젊은이들의 직업선택 보수화, 사회동맥경화 등으로 점점 창의적인 일을 하는 젊은이들, 노동인구가 줄어들 것이다. 당장 하루아침에 보이지 않아도 점점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다. 지난 10여 년 동안 공부 잘하는 아이들이 다 의대로 갔기 때문에 이제 바꾼다해도 그 10년은 공대생의 질이 떨어지게 돼 있다.
예전에 영국 정부에서 과학정책자문단장하던 한 교수를 만났더니 자기 밑에서 박사학위한 학생의 60%가 금융가에 가서 일하고 있다더라. 무슨 자원낭비인가. 그럴 바엔 차라리 7살 때 아이큐 테스트해서 펀드매니저 시키는 게 낫지, 인력왜곡이다.
우리나라가 저성장되는 건 우연이 아니다. 여러 요인이 맞물려 있다. 대외경제 여건 악화 때문만이 아니다. 그 점이 걱정돼 제가 외환위기 났을 때부터 이런이런 거 하면 성장이 안된다고 했는데 정부 쪽 분들은 아무도 안 듣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