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치국가에서 사법권은 뚜렷한 독립성을 지녀야 한다. 그래야 헌법이 존재의 당위성을 얻는다. 동시에 국민은 법치국가의 안에서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이제껏 우리의 현실은 달랐다. 헌정 사상 여러 차례 사법권 독립을 위한 목소리가 이어진 것도 이런 이유다.
사법권 독립을 위한 목소리는 이미 수십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71년 시국사건과 국가자산법 등에 위헌 판결이 내려진 게 시초였다. 판결에 불만을 품었던 검찰은 곧바로 칼날을 사법부를 향해 겨눴다. 현직 법관에 대해 뇌물죄를 적용,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다분히 보복성이었다.
법원이 이를 기각하자 검찰은 구속영장을 다시 청구했다. 뿔이 난 사법부는 사법권의 독립을 주장하며 항명에 나섰다. 판사 수십명이 집단으로 사표를 던졌고 결국 파장은 전국 법관으로 퍼졌다. 1차 사법 파동이었다.
1987년 6월 항쟁 직후, 1993년 김영삼 정부에서도 이같은 사법 파동이 있었다. 이처럼 몇 차례 사법부의 집단행동이 있었지만 사법권 독립을 일궈내지 못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권력은 사법부에 보이지 않는 간섭을 시작했다. 이들의 권리 아니 국민의 권리를 흔들었다. 여당이 야당이 되고, 야당이 여당이 되는 상황에도 사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사법부는 이를 막아내지 못했으며 우리는 권력에 휘둘렸다.
권력은 사소한 혐의로 국민을 수사하고 기소하지만 권력 스스로는 법치의 외부에 존재하며 법을 거스른다. 예컨대 2008년 시작한 촛불집회는 ‘비폭력 직접행동’의 효시였다. 대한민국 집회·시위 문화에서 화염병이나 투석이 사라지기 시작한 때였다. 그러나 검찰은 신고하지 않은 집회, 도로교통법 위반 등의 혐의로 1100여명을 기소했다.
반면 평화적 집회에서 시민을 걷어차고 구둣발로 얼굴을 뭉갰던 폭력경찰은 고소·고발에도 처벌받지 않았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이 해당 폭력경찰을 처벌해 달라고 재차 고발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경찰 차원에서 각하되거나 ‘기소 중지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되기도 했다. 실제로 처벌받은 경우는 단 한 건도 없었다.
다만 작은 변화는 있었다. 사법부 내부적으로 독립성을 갖추기 위한 자성의 노력이 커졌다. 국민이 배심원으로 참여하는 국민참여 재판도 좋은 예다.
우리는 불법노조가 합법으로 바뀐 지 15년 만에 다시 법외노조가 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양심선언을 했던 경찰 간부가 결국 조직을 떠날 수밖에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정권에 따라 하나의 법은 달리 해석되고, 권력에 따라 법치의 이중기준이 적용된다.
이런 상황에 사법부의 독립은 더이상 외부적인 요인만 탓할 수 없는 시대가 됐다. 사법부 스스로 풀어야 할 숙제가 된 셈이다. 제헌의 의미를 사법부 스스로 더 깊게 새겨야 할 날이 왔다. 바로 오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