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인희 칼럼] 때론 차선이 최선일 수 있다

입력 2015-02-12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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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인희 이화여대 교수

1980년대 후반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일어난 일로 기억된다. 당시는 에이즈(AIDS)로 인한 공포가 미국 전역으로 급속히 확산되던 시기였다. 흑인으로서는 미국 역사상 최초로 LA 시장 자리에 오른 톰 브래들리는 에이즈의 확산을 차단하기 위한 목적으로, 거리에서 마약을 하는 노숙인들을 대상으로 1회용 주사기를 무료로 배부해주도록 했다. 이유인즉, 오염된 주사기를 여러 사람이 함께 사용함으로써 에이즈 감염을 가속화시키는 데 기여하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마약 중독자를 위한 1회용 주사기 무료 배부는 즉시 여론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쳤다. 마약 중독 자체를 근절함으로써 주사기를 통한 에이즈 확산을 막는 것이 최선일진대, 정작 시민들이 낸 세금을 마약 중독자를 위해 사용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 반대의 주 이유였다. 이에 대한 브래들리 시장의 반응은 강경하고도 명쾌했다. “마약 중독을 근절하는 것이 최선임을 그 누가 모르겠는가? 하지만 그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에선 차선책을 강구하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한다”는 명언을 남겼다. 에이즈의 확산을 차단할 목적으로 일회용 주사기 공급을 감행했던 브래들리 시장의 결단은 훗날 최선의 선택이었음이 입증되었음은 물론이다.

최근 ‘증세 없는 복지’를 둘러싸고 여권 내부로부터 불협화음이 들려오고 있다. 청와대가 나서서 증세 없는 복지 원칙을 재차 확인하면서 이 문제는 현재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 분위기다. 그렇다고 분란의 불씨가 완전히 꺼졌다고 보긴 어려울 것 같다. 경기 부양책의 활성화 및 일자리 확대를 통해 세수의 원천을 늘림으로써 대통령 후보 시절의 공약을 실천하는 것이 국민을 위한 가장 최선의 방책임을 그 누가 모르겠는가.

하지만 정부가 동원 가능한 모든 정책수단을 펼쳐 놓아도 경기가 도무지 되살아나지 않아 지난해 예상했던 세수보다 약 11조원이 덜 걷힌 상황에서, 증세 없는 복지를 위한 원리원칙만을 고수하는 것이 과연 최선인지는 확신이 서질 않는다.

초저출산으로 인한 ‘인구절벽(demographic cliff)’의 위기 앞에서 정부가 내놓은 해법 또한 동일한 의구심을 불러일으킨다. 초저출산의 원인을 ‘만혼(晩婚)’이라 진단하고 이의 해결을 위해 결혼 적령기 여성들로 하여금 결혼을 조금 서두르도록 하고, 출산을 장려하겠다 함은 교과서에나 나올 법한 모범 답안이다.

물론 출산을 담당할 세대가 국가의 위기 상황을 공감하여 문제 해결에 적극 동참함으로써 출산율 반등에 성공한다면야 금상첨화일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아 결혼을 미루는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고, 출산을 기피하는데는 다 절실한 까닭이 있음을 우리 모두 익히 알고 있지 않은가. 이 경우에도 이상적인 최선책만을 추구하다 보면 문제 해결은 요원해지고, 그나마 차선책을 강구할 수 있는 기회마저 잃어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결국 정책의 성패 여부는 일정한 시간이 흐른 후 결과가 말해줄 것이다. 최선책을 강구했건만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면, 그 정책 수단은 실패한 것으로 판명날 것이요, 거꾸로 차선책을 사용했음에도 최선책 못지않은 성과를 거두게 되면 성공한 정책으로 자리매김될 것이 분명하다.

‘인기있는 정책’과 ‘좋은 정책’이 반드시 일치하지 않음은, 베스트셀러와 양서(良書)를 동일시 할 수 없다는 사실만큼이나 이젠 상식이 되었다. 증세 없는 복지가 한때 국민으로부터 인기를 얻은 정책이라 할지라도 현재의 상황에 붉은색 경고등이 켜지고 있다면, 국민을 향한 약속을 명분으로 비현실적인 원리원칙을 고수하기보다는, 차선책을 통해 현재의 위기를 돌파하는 유연함과 보다 큰 재앙에 대비하는 대범함을 발휘하는 것이 더욱 현명한 전략이 될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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