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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태종 3년(1403년) 4월 4일 사간원(司諫院)에서 시무(時務) 두어 조목을 올렸다. 현안에 대한 의견 제시다. “전하께서 총명예지(聰明睿知)한 자품(資品)으로 소의한식하여 다스림을 도모하시와 매사에 옛것을 따르오니, 그 치도(治道)의 융성함이 실로 근고(近古)에 없는 바입니다.” 일단 이렇게 칭찬을 늘어놓고는 뭐가 어떻고 저떻고 잔소리가 이어진다.
조선왕조의 기틀을 마련한 정도전(鄭道傳·1342~1398)은 경복궁 근정전과 근정문의 이름을 지어 바치면서 이렇게 아뢰었다. “옛 선비가 말하기를 임금은 아침에 정사를 듣고[聽政] 낮에는 어진 사람을 찾고[訪問] 저녁엔 법령을 다듬고[修令] 밤늦어 몸을 편안히 한다[安身] 했습니다. (중략) 천하의 일은 부지런하면 곧 다스려지고 부지런하지 못하면 곧 폐(廢)하게 됩니다.” 그래서 부지런할 근(勤)을 넣어 근정전(勤政殿)으로 지었다는 것이다.
나랏일로 노심초사하는 왕의 걱정을 소한지우(宵旰之憂)라고 한다. 조선 말기의 유학자 오남(吾南) 김한섭(金漢燮·생몰연도 미상)이 1894년 5월 1일에 쓴 ‘적도(동학 농민혁명군)에게 경고하는 글’[警示賊徒文]에 “너희들이 충효라는 말을 하는 걸 들은 적이 있는데, 충성스럽고 효성스러운 사람도 이런 일을 하는가? 위로는 국가에 소한지우를 끼치고, 아래로는 백성들에게 농사를 망치는 피해를 남겼다. 이와 같은 것이 정말 보국안민인가?” 하고 따지는 대목이 있다.
소의한식은 소의간식으로도 읽는다. 소한지우와 소간지우도 마찬가지. fusedtr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