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도생의 비정한 사회 적응에 실패한 사람들이 늘고 있다. 최근 빈발하는 묻지마식 범죄에 국민들은 불안하다. 정치가 국민에게 희망을 주지 못한 지 오래고, 언론은 대중으로부터 비난을 넘어 조롱의 대상이 됐다.
주역 계사전에 “궁즉변, 변즉통, 통즉구(窮則變 變則通 通則久)”라는 구절이 나온다. 나는 “궁해야 변하고, 변해야 통하니, 통하면 오래 간다”라고 읽는다. 사람이 변하지 않는 이유는 아직 궁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먹고 살 만한데 굳이 변화를 감수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우리 사회는 사회 안전망 확충을 위해 세금을 늘려야 하는지, 개성공단을 유지하는 것이 맞는지, 남북철도와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연결해야 하는지에 대해 국민적 합의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아직 이러한 문제들이 절박하지 않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궁해야 변하지만, 궁해도 변하지 않으면 개인은 도태되고 국가는 결국 소멸한다. 1백여 년 전 조선은 능동적 변화에 실패했다. 결국 왕조는 망했고, 백성은 국가의 보호를 못 받게 됐다. 그리하여 반도와 열도와 대륙에서 집단살해, 강간, 약탈 당하는 망국의 설움을 온몸으로 겪어야만 했다.
존경받는 원로가 사라진 지금 누구도 희망을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암울한 시대에 희망은 더욱 필요하다. 프랑스 파리가 1940년 6월 13일 독일군에게 함락되자, 샤를 드골은 6월 18일 BBC 방송을 통해 다음과 같은 연설을 했다. “모든 것이 끝났습니까? 모든 희망을 버려야 합니까? 패배는 뒤집을 수 없는 것입니까? 이 모든 질문에 나는 ‘아니요’라고 대답합니다.”
이 질문은 지금 우리 모두에게 유효하다고 믿는다. 우리 민족의 위대한 능력을 찬란하게 꽃피우기 위해 변해야 한다. 우리에게 변화를 강제하기 위해 지평선 저 너머에서 곤궁함의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