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9월 30일 췌장암과 패혈증으로 숨진 비전향 장기수 정순택(1921.5.8~2005.9.30)의 유해가 그해 10월 2일 남북 간에는 처음으로 북한에 송환돼 평양 애국열사릉에 안치됐다. 그는 47년 만에 꿈에 그리던 북한 가족의 품에 안겼다.
충북 진천에서 태어난 정순택은 상공부 공무원으로 재직 중 월북해 북한에서 기술 자격 심사위원회 책임 심사원으로 일했으며 1958년 남파됐다 체포돼 1989년까지 31년 5개월간 복역했다. 그는 석방 당시 전향의사를 밝힌 것으로 알려졌지만 1999년 “고문에 의한 강제 전향이었다”면서 전향 철회를 선언하며 북송을 희망했다.
하지만 2000년 9월 1차 북송 대상자에는 포함되지 못한 채 암으로 힘겨운 투병 생활을 하다 84세를 일기로 서울 대방동의 한 병원에서 운명했다. 북한에서는 장남 정태두 당시 김책공대 교수와 모 과학원의 연구원인 둘째 아들 등 아들 네 명이 모두 고위직으로 활동하고 있었으며, 부인은 1995년께 숨졌다고 알려져 있었다.
비전향 장기수는 1993년 3월 19일 이인모(1917~2007)가 처음 북한에 보내진 뒤 7년 만에, 남북정상회담 직후인 2000년 9월 63명이 송환됐다. 그 후 16년이 지났지만 비전향 장기수들의 2차 송환은 아직도 제대로 이뤄지고 있지 않다. 2001년 33명이었던 2차 송환 대상자도 이젠 20명도 채 안 남았다.
비전향 장기수 송환은 납북자와 국군포로 관련 단체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1960∼70년대 납북 어부 가족들의 반발이 거셌다. 그 배경에는 북한에 가족을 빼앗긴 ‘피해자’이면서도 국가의 보호를 받기는커녕 ‘혹시 납북 어부가 간첩으로 파견됐을 때 가족이 협조할지 모른다’고 의심한 정권의 ‘연좌제 차별’이라는 역사가 있었다. 슬픈 역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