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3년 시작돼 4년이 넘도록 지지부진하던 일본과 유럽연합(EU)의 경제연대협정(EPA) 협상이 지난 6일(현지시간) 갑작스럽게 큰틀에서 합의를 이뤄냈다고 발표돼 세계의 이목을 끌었다. 앞으로 세부 항목에 대한 양측의 협의가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일본과 EU 간의 EPA는 2019년부터 발효된다.
주목할 건 일본과 EU 양측이 이 사실을 발표한 타이밍이다. EU와 일본은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개최를 하루 앞둔 시점에 EPA의 큰틀의 합의를 이뤘다고 발표했다. 4년이 지나도록 별다른 진전이 없던 일본과 EU 간의 무역협상이다. 게다가 양측의 EPA가 발효되려면 아직 수 년이 남은데다 최종 합의까지도 적지 않은 난관이 불을 보듯 뻔한 상황.
파이낸셜타임스(FT)는 이처럼 갈 길이 먼데도 불구하고 일본과 EU가 왜 무역협정을 미리 터트렸는지 의문을 제기하며, EU와 일본의 EPA는 단순한 ‘무역협정’ 그 이상을 의미한다고 10일 지적했다. FT는 EU와 일본의 EPA 큰틀 합의는 G20 정상회의 직전의 PR 전략을 의도한 것이었다고 강조했다. 미국우선주의를 내세우며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협상에서 탈퇴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고립시키려는 회심의 일격이었다는 것이다.
더 자세한 내막은 이렇다. 9일 니혼게이자이신문에 따르면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미국이 TPP 협상 테이블에서 탈퇴하자 초조해졌다. 이에 4년 넘게 끌어오고 있는 EU와의 EPA라도 어떻게든 성사시키고자 결심했다. 세계 국내총생산(GDP)의 30%를 차지하는 일본과 EU의 EPA가 실현되면 자유무역 체제를 지킬 수 있는 바람막이가 될 수 있다는 믿음에서였다. 이에 아베 총리는 트럼프 정권이 출범하자마자 EU 측과 물밑 접촉을 본격화했다. 비밀리에 자신의 측근인 이마이 나오야 수석 비서관을 벨기에 브뤼셀에 보내 장 클로드 융커 EU 집행위원장을 만나게 했고, 그 자리에서 양측은 7월 독일 함부르크 G20 정상회의에서 EPA의 큰틀에 합의하는 절차에 합의했다. EU 측도 밑지는 장사는 아니었다. 영국의 EU 탈퇴로 구심력이 흔들리는 가운데 자유무역의 중요성을 재확인하고 유대를 강화해야 한다는 데 대한 공감대가 강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함부르크에서 열리는 G20 정상회의는 일본-EU 간 EPA 합의를 홍보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다. 일본과 EU간 EPA 협상이 타결되면 일본은 0.29%, EU는 0.76%의 GDP가 개선될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여기다 일본과 EU간 EPA 합의는 미국이 빠진 TPP의 조기 발효를 위한 논의에도 불쏘시개 역할을 할 것이라는 계산이 깔려있었다. 아베 총리는 6일 공동기자회견에서 일본과 EU의 EPA 합의가 TPP의 조기 발효를 견인할 것이라는 견해를 나타냈다. 미국을 제외한 나머지 11개 TPP 회원국은 일본과 EU를 중심으로 유대관계를 강화할 것으로 보인다고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전했다. 이와 관련해 한 일본 외무성 관계자는 “미국으로하여금 다시 TPP로 복귀하도록 하는 강한 메시지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세계 3위 경제국인 일본에 유럽산 유제품이 유입되면 위기감을 가진 미국 축산업계가 정권을 자극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미국 정부도 좌시할 수 만은 없는 상황에 내몰릴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이번 일본과 EU 간 EPA 합의는 어디까지나 첫 단추를 끼운 것일 뿐이다. 양측은 쟁점인 자동차 관세 철폐까지만 해도 최장 7년이 걸릴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