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획득한 지식의 84%는 눈을 매체로 한 것이다”(R.F.Wilson)라는 메시지는 시각적 정보인지의 중요성을 의미하는데, 이 개념과 함께 ‘시각정보를 구성하는 형태와 컬러 중 인간은 컬러를 더 강하게 인지하고, 컬러는 형태에 비해 감성/정서적 소구력이 더 우세하다’라는 연구결과들은 광고를 비롯해 다양한 커뮤니케이션 영역에서 핵심적인 기준으로 활용되어 왔다. 컬러에 대한 연구와 실험은 다양한 분야에서 지속되고 있는데 심리학에서도 진단 혹은 치료를 위해 컬러를 적극적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인간의 눈은 셀 수 없이 많은 컬러를 인지하지만 디지털이나 인쇄 구현에 제약이 많았던 시대를 지나 여러 매체에 점점 더 많은 색을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게 되면서 기업이나 상품뿐만 아니라 개인과 도시, 국가에 이르기까지 정체성을 나타내는 주요 요소로 각자의 고유한 컬러를 선점하고 각인시키기 위해 여러 노력을 하고 있다. 저마다의 컬러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많아지니 반대급부로 어떤 컬러도 수용 가능한 흑과 백을 선호하기도 하고, 하나가 아니라 맥락에 따라 변화 가능한 컬러시스템으로 개성을 표현하기도 한다. 컬러의 중요성에 대해 갑론을박하는 경우도 종종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름’을 표현하고 ‘이야기’를 입히며 정적인 맥락에 생동감을 줄 수 있으니 주인공이 아니라 작은 포인트로서도 충분히 의미 있다.
다시 ‘올해의 팬톤컬러’로 돌아와보자. 2020년에는 차분함과 신뢰, 심리적 안정감을 느끼게 하는 클래식블루가 선정되었는데 그 이유는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을 비롯해 다이나믹하게 변화하는 환경에서 보편타당한 가치와 쉽게 변하지 않는 본질, 편안함을 추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했었다.
2021년의 컬러는 현재 우리가 당면한 시대상황을 잘 반영하고 있는데, ‘인내와 긍정’, 다른 표현으로는 ‘강인함과 극복의 힘’의 의미를 담은 얼티밋그레이(Ultimate Gray)와 일루미네이팅(Illuminating; 화사하고 밝은 노란색)이 그 주인공이다. 오랜 풍화를 견뎌낸 해변의 자갈처럼 견고하고 안정적이며 지속할 수 있다는 확신을 주는 회색과 불확실한 미래로 불안한 삶을 극복하기 위한 희망의 에너지를 상징하는 밝은 노란빛 두 가지다.(참고: https://www.pantone.com/color-of-the-year-2021) 컬러의 이름에서도 느껴지듯이 얼티밋에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루미네이팅에서는 ‘한 줄기 빛’이 연상된다. 우리에게는 추운 겨울을 뚫고 나온 개나리가 떠오를 수도 있다.
예년 같았으면 올해의 컬러를 일에 어떻게 적용해볼까 먼저 생각했겠지만 이번에는 조금 다르다. 계속되는 불안 속에 어디에 두 발을 단단히 붙일지 어떤 희망의 끈을 발견해야 할지 몰라 주춤하고 멈칫하는 때에 두 컬러를 보면서 여러 가능성을 상상해본다. 어지러진 2020년을 어떻게든 정리하고 새해 새날을 맞이하며 각오를 다짐하는 시기에 아주 작고 소소한 마음의 부적으로 ‘컬러’를 활용해보면 어떨까. 장황한 근거가 필요하거나 누군가 정해준 색이 아니라 각자의 소망과 바램을 담아 ‘비타민’이든 ‘안정제’든 자기 주문을 읊을 수 있는 장치를 하나쯤 만들어 놓는 것은 마치 탄생석이나 별자리의 운을 괜히 믿어보는 것처럼 곁에 두는 것만으로도 작은 힘이 될 수 있겠다.
흑과 백도 컬러인가, 각기 다른 컬러의 속성은 무엇인가 묻는다면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고 싶다. 지금 우리의 마음과 감각이 원하는 무엇이든 좋다. 우리는 아주 작은 기운이라도 보태야 하는 그런 시기를 살아내고 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