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法 “불법구금만 따로 소멸시효 완성 안 돼…과거사정리법 적용”
2021년 장모 씨 국가배상판결 재확인…‘중대한 인권침해‧조작사건’
국가안전기획부(이하 안기부)와 보안사령부(보안사)에 의해 조작된 1987년 ‘재일유학생 간첩단 사건’에 연루돼 국가보안법 위반 누명을 쓴 양모 씨에 대한 국가의 배상책임이 확정됐다. 대법원은 같은 사건으로 억울한 옥살이를 했다가 재심으로 무죄를 선고 받은 장모 씨에 대해 국가배상을 판결한 2021년 5월 대법 판례 입장을 거듭 확인했다.
특히 대법원은 이번 양 씨 사례를 통해 안기부‧보안사 등 수사기관의 수사 발표, 보도자료 배포, 지명수배 조치, 구금까지 수사기관의 일련의 행위가 ‘전부 불법’이라고 확인했다.
![▲ 서울 서초동 대법원 전경. (연합뉴스)](https://img.etoday.co.kr/pto_db/2023/03/20230327082915_1866291_1200_782.jpg)
대법원 2부(주심 민유숙 대법관)는 양 씨가 대한민국을 상대로 제기한 국가배상 청구 사건에서, 원고 양 씨에 대한 지명수배가 위법하지 않다고 판단하고, 나아가 불법 구금만 따로 중대한 인권 침해‧조작 의혹 사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봐 과거사정리법 적용을 부정하고 그 부분은 소멸시효가 완성됐다고 판단한 원심 판결을 파기‧환송했다고 9일 밝혔다.
대법원은 “피고(대한민국) 산하 안기부 및 보안사가 불법구금‧가혹행위 등으로 위법하게 증거를 수집했고 이에 기초해 이뤄진 수사 발표, 보도자료 배포, 지명수배는 모두 원고 양 씨에 관한 수사 절차의 일환으로서 전체적으로 위법하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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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에 따르면 안기부 등은 1987년 당시 일본 유학 중이던 장 씨를 겨냥한 위법한 수사 결과를 바탕으로 ‘양 씨가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 대남공작 조직에서 활동하면서 장 씨에게 지령을 내린 간첩’이라는 취지로 수사 발표 및 보도자료를 배포했다. 수사기관은 1993년 양 씨를 지명 수배하고, 이로 인해 한국에 입국하지 못하던 양 씨가 입국하자 1998년 불법 구금해 수사했다. 2018년 양 씨와 그 친족들은 대한민국에 국가배상을 청구하게 됐다.
원심은 양 씨에 대한 수사 발표 및 보도자료 배포, 불법 구금이 위법하다고 인정하면서도 지명 수배는 소재불명 된 피의자의 소재 발견을 위한 수사 방편의 하나로서 수사기관 내부의 단순한 공조 내지 의사연락에 불과하므로 지명수배 조치 자체가 위법한 공권력 행사로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게다가 원심 재판부는 불법 구금에 대해서는 양 씨가 자수 형식으로 귀국‧조사받으면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에 자백 취지로 진술했다는 등의 이유로 중대한 인권 침해‧조작 의혹 사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보아, ‘불법 구금에 있어선 피고 대한민국 정부의 국가배상청구권이 시효가 완성돼 소멸했다’는 항변을 받아들였다.
![▲ 김명수 대법원장을 비롯한 대법관들이 서울 서초동 대법원 대법정에 착석해 있다. (사진 제공 = 대법원)](https://img.etoday.co.kr/pto_db/2022/12/20221222155541_1833324_1200_800.jpg)
하지만 대법원은 사건을 다시 심리‧판단하라며 원심 판결 일부를 깨고 서울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냈다. 우선 대법원은 지명수배 조치가 위법하다고 지적했다.
대법원은 “피고 산하 안기부가 관련자들에 대한 불법구금‧가혹행위 등 위법한 방법으로 증거를 수집했고 이에 기초해 이뤄진 수사 발표, 보도자료 배포, 지명수배는 모두 원고 양 씨에 대한 수사 절차의 일환으로서 전체적으로 보아 공무원이 직무를 집행하면서 객관적 주의의무를 소홀히 하여 그 직무행위가 객관적 정당성을 상실한 것으로서 위법하다고 평가할 수 있다”고 판시했다.
아울러 대법원은 불법구금에 대해서만 개별적으로 소멸시효가 완성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대법원은 “피고 산하 안기부 및 보안사 수사관들이 관련자들에 대한 불법 구금, 가혹 행위 등을 통해 받아낸 ‘임의성 없는 자백’을 기초로 ‘증거를 조작’한 사건으로 과거사정리법상 ‘중대한 인권 침해 사건‧조작 의혹 사건’에 해당한다”고 적시했다.
따라서 원고 양 씨에 대한 ‘수사 발표→보도자료 배포→지명수배→불법 구금’은 모두 중대한 인권 침해 사건‧조작 의혹 사건을 구성하는 일부분이고, 이 중 일부 행위만을 떼어내서 과거사정리법의 적용을 부정하는 것은 상당하지 않다고 대법원은 설명했다.
박일경 기자 ekp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