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들 사이에 ‘돈맥경화’ 불안감이 확산하고 있다. 비상계엄 사태 이후 윤석열 대통령 탄핵 정국이 본격화하면서 한국 경제와 기업들이 ‘퍼펙트 스톰’(다발적 악재에 따른 경제적 위기 상황)에 노출되고 있어서다. 이번 탄핵 국면은 2016년 당시와는 달리 재계와의 직접 연관성은 없지만, 권력자의 갑작스러운 비상계엄 선포로 촉발됐다는 점에서 해외 거래처나 기관투자자들이 더 심각하게 보는 분위기인 것으로 전해진다. 국가 대외신인도에 타격을 입으면서 경제와 기업 전반이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전문가들은 “기업이 돈맥경화에 빠져 신용리스크가 커지면 흑자 도산 기업이 속출하고, 더 나아가 시스템 리스크가 터질 수 있다”고 우려한다.
상장기업 A 대표는 요즘 거래은행 기업대출 담당자를 쫓아다니는 게 일상이 됐다. 글로벌 공급망 붕괴와 경기침체 우려 등으로 수출물량이 줄어 매출이 반 토막이 난 상황에서 탄핵 정국까지 본격화하자 거래은행이 상환 독촉이 심해졌기 때문이다. A 씨는 “대출 만기를 연장하고 싶은데 한차례 연기한 터라 은행을 설득하기 쉽지 않다. 회사채를 발행하고 싶은데 증권사들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라고 토로했다.
시장과 기업들은 금리 향방에 온 신경을 쏟고 있다. 내년 기업들이 상환해야 할 일반 회사채는 61조6524억 원에 달하기 때문이다. 올해 69조8596억 원보다는 줄었지만, 역대급 수준이다. 신용등급 ‘A+’ 이하 비우량 회사채의 만기도 13조1078억 원이나 된다.
현재 금리만 보면 걱정은 없다.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3일 연 2.585%였던 국고3년 금리는 계엄령 다음날 연 2.626%까지 치솟았다가 현재 2.5%대로 떨어졌다. 국고10년 금리도 비슷한 흐름이다. 은행과 자산운영사 등 국내 기관들의 매수가 시장을 방어해준 덕이다.
문제는 탄핵 정국이 길어질수록 금리를 압박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2016년 12월 9일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안 가결 직전까지 약 한 달간 국고채 금리는 3년 기준 0.35%포인트(p), 10년 기준 0.55%p 상승했다. 이후 헌법재판소 탄핵 결정(2017년 3월 10일) 때까지 금리는 떨어지지 않았다.
시장에서는 탄핵발 경기 위축과 기업활동 둔화로 한계기업이 속출할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한국은행의 ‘금융안정 상황’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외부감사를 받는 전체 기업(2만8946곳) 가운데 16.4%(4761곳)가 한계기업으로 나타났다. 1년 전(15.5%)보다 0.9%포인트 증가했다. 한계기업은 영업익을 이자비용으로 나눈 값이 1 이하인 취약기업 상태가 3년 연속 이어진 기업을 의미하는 용어로, 벌어들인 영업이익으로 이자도 내지 못하는 상태가 장기 지속된 기업을 일컫는다. 이상호 한국경제인협회 경제산업본부장은 “내수 부진이 지속되는 가운데, 세계 경기 위축과 반도체 등 주력업종 하락 사이클 진입 등으로 지금의 수출 실적이 고점에 달한 것 아니냐는 위기감도 커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자금 조달 길도 얼어붙었다. 11월 회사채 발행액은 전달보다 8조4000억 원 감소한 7조7000억 원에 그쳤다. 이달 들어서도 1~3일 5324억 원이 순발행됐지만, 비상계엄령을 선포한 직후인 지난 4일부터 11일까지 회사채 순발행액은 610억 원에 그쳤다.
자금경색에 빠진 기업이 많아지면, 경제 전반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준다.
당장 한계기업이 늘면 금융권 재정 건전성에 부담으로 작용한다. 예금취급기관의 한계기업 신용공여(대출과 회사채 등) 규모는 지난해 말 기준 은행권이 125조3000억 원으로 전체 차입금의 88%를 차지한다.
한국은행의 시뮬레이션에 따르면 업종 내 한계기업 비중이 10%p 상승할 경우 정상기업의 매출액 증가율은 2.04%p 하락했다. 또 정상기업의 평균 차입 이자율도 0.11%p 상승한 것으로 분석됐다.
한국은행이 홈페이지에 소개한 빅토리아 이바시나 미국 하버드대 교수 등의 논문은 “기업부채 증가는 금융위기 확률을 유의미하게 높이고, 가계부채 증가가 견인한 금융위기보다 기업부채 증가가 선행된 위기일 때 경제 위축이 더 커진다”고 분석했다. 하버드대 연구진이 1940년부터 2014년까지 115개국의 기업부채를 분석한 결과다. 한은은 이 연구의 시사점에 대해 “금융안정을 위한 모니터링과 건전성 규제 입안 시 기업부채도 가계부채 못지않게 중시해야 함을 시사한다”고 강조했다.
글로벌 자금이 우리 증시에서 해외로 빠져나가면서 유동성이 감소해 우리 주식시장마저 ‘좀비시장’으로 전락할 수 있다.
김명실 iM증권 연구원은 “비상계엄 사태 이후 빠른 수습이 금융시장 불안을 잠재울 수 있지만 당분간은 불확실성을 함께 안고 가게 됐다”며 “정치적 불안정성의 확대는 국가 신인도의 하락을 야기할 수밖에 없으며, 중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국내 펀더멘탈에 의해 크레딧 시장이 좌우된다는 점으로 미뤄보면 현재는 약세 재료가 우세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