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한 상황에서도 파괴되지 않는 미키의 성장 서사

영화 '미키17'을 연출한 봉준호 감독이 19일 국내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로버트 패틴슨이 연기한 주인공 '미키'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며 이같이 밝혔다.
봉 감독은 "현실의 쓰라린 모습을 풍자하는 것까진 좋았는데, 그 한복판에 있는 주인공이 가혹한 상황으로 내몰리는 경우가 많았다. 미키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죽는 게 직업이니까 이보다 더 가혹한 상황은 없을 것 같다"라며 "그렇지만 그걸 극복하고 파괴되지 않는 모습을 담고 싶었다"라고 설명했다.
'기생충' 이후 6년 만에 돌아온 봉 감독의 이번 영화는 에드워드 애슈턴의 SF소설 '미키7'이 원작이다. 마카롱 장사를 하다가 망한 미키가 반복적으로 죽어야 하는 직업인 익스펜더블, 즉 인간 소모품으로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지구를 떠나 '니플하임'이라는 새로운 행성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미키는 온갖 위험한 상황에 노출된다. 인류의 발전을 위해 극한의 작업 환경에 놓인 미키는 지속적으로 죽고, 다시 태어난다. 인간 소모품으로 살아가는 미키 옆에 '나샤'(나오미 애키)라는 인물이 있다. 미키는 나샤와의 사랑으로 이 같은 엄혹한 상황 속에서도 자신을 잃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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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 감독은 "원작에서도 미키와 나샤의 사랑 묘사가 참 좋았는데 그런 부분을 (영화에서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라며 "내 영화 최초로 사랑 얘기가 나오는 셈이다. 그렇다고 이 영화를 멜로라고 주장하는 건 아니다. (영화 전체로 보면) 일부지만 되게 중요했다"라고 설명했다.
'미키17'은 봉 감독의 전작들처럼 계급 간의 충돌을 서사의 주된 동력으로 삼는다. 무거운 사회적 메시지를 전하면서도 익살과 해학을 놓치지 않는다. 영화는 무조건 재미있어야 한다는 그의 신념이 이번 영화에도 충실히 반영됐다.
또한, '미키17'은 '설국열차'(2013)와 '옥자'(2017)에 이어 봉 감독이 세 번째로 만든 SF 영화이기도 하다. 공교롭게도 그가 만든 영어영화가 모두 SF 장르라는 공통점이 있다.
이에 대해 봉 감독은 "이안 감독이 1997년에 '아이스 스톰'이라는 영화를 찍었다. 1970년대 미국 가족들의 이야기를 다뤘다. 아주 구체적이고, 시대의 공기가 담긴 영화다. 대만 감독이 그걸 해낸 건데, 난 그럴 자신이 없다"라고 말했다.
이어 "다른 언어권 영화를 하게 될 때, SF 장르가 마음에 놓인다. 우화적이면서 약간은 추상화해서 표현해도 되기 때문"이라며 "영어권 영화를 할 때 SF 장르에 의지하게 되는 것 같다"라고 밝혔다.

세계영화사에 한 획을 그은 '기생충' 이후 내놓는 작품에 대한 부담감은 없었을까. 봉 감독은 "세계를 제패했다는 표현은 민망하다"라며 "그저 이상한 영화를 만드는 감독으로 기억되고 싶다"라고 밝혔다.
봉 감독은 "어떤 환경과 조건에서도 끊임없이 이상한 톤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 '미키17'도 따뜻하고 밝은 영화지만, 동시에 이상한 구석도 많다. 영화감독은 결국 영화를 찍는 사람이다. 육상선수처럼 기록을 경신하는 건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날 인터뷰에서 봉 감독은 극장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는 "(OTT와 같은) 스트리밍이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거대한 스크린 앞에서 같이 모여 새롭게 펼쳐질 두 시간의 스토리를 기다린다는 극장의 원초적 파괴력을 따라갈 수는 없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국적으로 구분하면 '미키17'은 미국영화지만 한국 감독으로서 한국 배우들, 한국 관객들과 밀착하면서 호흡하고 싶다. 한국 극장들 역시 다이내믹하게 굴러갈 것이라 낙관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미키17'의 시간적 배경이기도 한 2054년에 무엇을 하고 있을 것 같은지 묻자 봉 감독은 "85세?"라고 말하며 머리를 갸우뚱한 뒤에 "'은하철도 999'에 나오는 기계 몸을 장착하고 시나리오 작업을 하고 있을 것 같다. 나의 184번째 영화"라고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