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인연령 20년 전보다 4살↑…출산연령도 우상향
일자리 부족에 일가정양립 난망…"미루는 게 당연"
"청년이 부양인구로 전락…EU청년보장제 고민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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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이 됐지만 독립, 취업 등 사회적 책임을 미루려는 현상을 모라토리엄 증후군(moratorium syndrome)이라 부른다. 한 국가가 외채를 갚지 못할 때 선언하는 모라토리엄(채무상환 유예)에서 파생됐다. 우리나라 청년도 이 늪에 빠진 걸까. 일도 구직도 하지 않고 '그냥 쉰' 2030 청년층은 70만 명에 달하고 혼인·출산 연령도 우상향하고 있다. 청년의 사회적 유예가 길어질수록 국가 성장 동력 손실도 커지는 만큼 구조적 대책이 필요하다고 전문가는 지적한다.
24일 통계청 국가통계포털(KOSIS)에 따르면 지난해 20·30대 '쉬었음' 청년은 전년대비 7.3% 증가한 69만1000명으로, 관련 통계가 작성된 2003년 이후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다. '쉬었음'은 경제활동인구조사에서 취업·실업자가 아닌 비경제활동인구 중 중대한 질병·장애는 없지만 '그냥 쉰다'고 답한 이들이다.
'쉬었음' 청년 증가 요인으로는 고용시장의 수시 채용·경력직 선호, 부족한 양질 일자리 등이 거론된다. 송준행 통계청 고용통계과장은 "수시 채용, 경력직 선호 현상으로 취업준비보다 쉬는 청년이 늘어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2024년 8월 경제활동인구조사 비경제활동인구 부가조사 결과'에 따르면' 15~29세 '쉬었음'의 주된 이유는 '원하는 일자리를 찾기 어려움'이 30.8%로 가장 많았다(30대 27.3%).
구직 의지가 있어도 취업이 쉽지 않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5월 기준) 20~34세 청년층이 졸업 후 첫 취업까지 걸린 기간은 14개월로 전년대비 2개월 늘어났다. 이는 관련 통계를 집계한 2017년 이래 최장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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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직자가 선호하는 대기업·공공부문 취업문이 좁아지는 흐름은 이와 무관치 않은 것으로 해석된다. 11일 인크루트가 국내 대기업 100곳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올해 채용 계획을 확정한 대기업은 전년대비 13.0%포인트(p) 하락한 54.0%로 집계됐다. 공공기관 경영정보 공개시스템(알리오)에 따르면 작년 339개 공공기관이 채용한 일반정규직은 1만9920명으로 5년 연속 감소세를 이어갔다.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명예교수는 "청년층 학력이 세계적으로도 높은 수준인데 갈 만한 양질의 일자리가 턱없이 부족한 것"이라며 "고학력 눈높이에 맞는 일자리를 신산업, 공공부문에서 만들어내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혼인·출산 연령도 지속적으로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2023년 평균 혼인 연령은 남편 33.97세, 아내 31.45로, 10년 전인 2013년(남편 32.21세·아내 29.59세)과 비교하면 남편은 1.76세, 아내는 1.86세 올랐다. 20년 전(2003년, 남편 30.14세·아내 27.27세)과 비교하면 격차는 더욱 커진다.
출산 평균 연령도 2023년 33.64세로 매년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다. 2005년(30.23세) 30세를 넘어선 뒤 2010년31.26세, 2014년 32.04세, 2019년 33.01세 등 최근 약 5년 주기로 평균 출산 연령이 1세씩 늘어나는 흐름이다. 다만 지난해 합계출산율(가임여성 1명이 평생 낳을 것으로 기대되는 출생아 수)은 전년대비 소폭 오른 0.75명으로 예상된다. 2015년(1.24명) 이후 2023년(0.72명)까지 매년 줄어들다 9년 만에 반등은 기정사실이지만 여전히 0.7명대로 2030년 정부 목표치(1.0명)까지는 갈 길이 멀다.
김성희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교수는 "청년들이 미래 담보가 안 되는 불안정한 삶에서 결혼, 출산 등의 단계를 뒤로 미룰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며 "일자리의 질적 전환은 물론 청년의 미래 설계 부담을 덜어줄 수 있는 지원 정책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결혼과 출산이 늦어지는 배경으로는 여성의 사회 활동 증가, 일·가정 양립의 어려움, 높은 집값에 따른 주거 불안 등이 꼽힌다.
김정식 연세대 경제학부 명예교수는 "여성의 사회 활동이 늘어나면서 이전보다 결혼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면도 있지만 안정적인 일자리가 많이 없고 주택을 마련하기 어려운 점도 출산이 늦어지는 이유라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임운택 계명대 사회학과 교수도 "한국은 기업이 출산에 호의적인 나라라고 보기 어렵다"며 "양육에 대한 기업 문화가 바뀌고 사회적 인프라도 따라가지 않으면 경력단절 때문에 출산을 포기하는 사례가 더욱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청년의 취업·결혼·출산 유예 혹은 거부가 결국 생산성 저하, 사회 비용 확대에 따른 저성장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김정식 교수는 "청년들이 일을 하지 않고, 결혼을 늦게 하거나 하지 않으면 출산율도 떨어지니 젊은 인구도 줄어들게 되니 경제적으로는 저성장 국면으로 진입하게 된다"고 말했다. 이병훈 교수도 "새 노동자원인 청년들이 계속 시장에 유입되면서 부가가치를 생산해야 하는데 이들이 부모나 국가가 책임져야 하는 부양인구로 전락한다면 경제적 비용만 사회가 안게 되는 부작용이 생긴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유럽연합(EU)의 청년보장제(Youth Guarantee)가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조언한다. 청년보장제는 25세 이하 청년이 학교를 졸업하거나 실직할 경우 4개월 내 정부가 개입해 취업에 필요한 교육 훈련, 심리 상담 등을 제공하는 제도다. 정부도 지난달 이를 벤치마킹한 '한국형 청년보장제' 실행 구상을 밝혔다. 고용노동부는 올해 대학 졸업 예정자 5만 명을 대상으로 졸업 4개월 내 1:1 맞춤형 취업서비스를 지원할 계획이다. 이병훈 교수는 "EU의 청년보장제처럼 청년들의 취업에 국한하지 않고 주거와 금융부채 지원, 심리 상담·치유 등 종합적인 복지 대책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