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북 일대를 휩쓴 화마에 지금까지 30명이 목숨을 잃었다. 사망자 산불영향구역은 5만㏊(헥타르)에 육박한다. 여의도 면적의 166배 면적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축구장 면적으로는 6만7000개를 훌쩍 넘는다. 이재민은 6885명에 달한다. 사망자·이재민 수, 피해 면적 모두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최악의 산불이라고 한다.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는 산불 피해 이재민들을 향해 '산불 피해 복구가 완료될 때까지 모든 재정적 지원과 행정적 뒷받침을 아끼지 않겠다'고 했다.
역대급 화마가 평화롭던 시골 마을을 집어삼켜 이재민들의 삶을 앗아갈 때 정치권은 낯 뜨거운 숫자공방을 벌였다. 여당이 산불 사태 대응에 예비비 복원이 시급하다며 정부에 추경 편성을 요청하자 야당은 있는 돈부터 쓰라고 맞대응했다. 국민의힘은 "재원이 충분하다는 건 사기극"이라고 다시 맞섰고, 민주당은 "야당의 예산삭감을 탓하는 것이야말로 거짓말"이라고 맹비난했다.
여당이 정부에 요청한 추가 예비비 규모는 2조 원. 민주당이 2조6000억 원의 정부 안 중 1조 원을 삭감해 목적 예비비가 1조6000억 원뿐인데, 예산 대부분이 특정한 목적에만 쓸 수 있어 재난 대응에 쓸 수 있는 건 4000억 원에 그친다는 게 국민의힘의 입장이다. 민주당을 향해 예비비를 삭감한 데 대한 대국민 사과도 촉구했다.
민주당은 부처별로 흩어져 있는 재해재난대책비가 9200억 원이라고 반박했다. 특히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현재 산불 대책에 사용할 국가 예비비가 4조8000억 원이라고 거들었다. 이에 국민의힘은 즉각 가용할 수 있는 예산은 6000억 원이라고 재반박하며 "이 대표와 민주당은 엉터리 숫자놀음으로 국민을 기만하고 있다"고 일갈했다. 이 대표는 다시 여당을 향해 "예비비 중 한 푼이라도 쓴 게 있나. 울고 있는 국민의 아픔이 공감되지도 않나. 최소한의 인간성을 회복해야 한다"고 쏘아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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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이 국민의힘의 예비비 증액 시도를 마뜩하지 않게 보는 건 윤 대통령의 계엄 선포 당시 쪽지 논란과 무관하지 않다. 12·3 비상계엄 선포 직전에 열린 임시국무회의에서 윤 대통령이 최상목 경제부총리에게 '예비비 등 재정자금 확보' 등의 내용이 적힌 쪽지를 건넨 탐탁지 않은 기억에 기인한다. 예비비가 계엄 과정에서 거론된 것으로 볼 때 자칫 쌈짓돈처럼 쓰일 수 있다는 우려가 녹아 있는 것이다.
탄핵 정국에 여야는 한껏 신경이 곤두서있다. 윤 대통령 석방, 한 대행 등 민주당 주도의 줄탄핵에 대한 헌재의 줄기각, 이재명 대표의 공직선거법 항소심 결과 등 각종 변수에 정치권은 뾰쪽해질 대로 뾰족해져 건건이 신경전을 벌인다. 힘겨루기에서 밀리지 않고, 비세(非勢)를 인정하기 어려운 것이 정치인들의 생리임을 이해하나, 지금은 아니다. 인간의 저항을 무력하게 한 괴물 같은 불바람에 분투했던 진화대원과 집을 잃은 수천명의 국민을 두고도 숫자 공방을 한다는 건 산불 현장에서 이재민들의 손을 잡으며 '돕겠다'고 말한 자신들의 행동을 가식으로 인정하는 제살깎기와 같다.
계엄 100일을 넘기고도 좀처럼 끝나지 않는 탄핵 정국이다. 민주당 초선 의원들은 한 대행이 마은혁 헌법재판관 후보자를 임명하지 않으면 최상목 경제부총리와 함께 '쌍탄핵'을 추진하고, 국무위원 역시 연쇄탄핵할 수 있다고 했다. 여당은 '국헌 문란'이라며 내란음모죄·내란선동죄 고발로 맞불을 놨다. 정치권의 혼란은 윤 대통령 선고가 나오면 극에 달할 것이 자명하다. 홍준표 대구시장이 "기각되면 대혼란이 올 것이고, 인용되면 정치적 내전"이라고 말했듯 어떤 결과가 나오든 후폭풍은 불가피하다. 한쪽이 승복하지 않으면 사회·정치적 격랑을 피하긴 어려울 것이다.
국민을 달래는 정치는 바란 적이 없다. 다만 어려운 경제에 살길을 찾는 국민도, 터전을 잃고 대피소에서 웅크린 채 쪽잠을 자는 이재민도 안중에 없는, 자극과 모략의 끝장 대립이 지금 이 나라를 좀먹는 독이 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