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 독립운동 명문가의 헌신...‘임면수와 가족의 이야기’

입력 2025-04-01 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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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이 기억하는 임면수의 정신, 오늘날의 노력

-수원에서 국채보상운동,삼일학교 기부 등 주도하며 애국계몽운동 활동
-만주 망명 항일 인사 중 유일한 수원 출신, ‘비밀거점’객주업 운영
-재산 기부하고 독립운동 전념,부인 전현석·장남 임우상도 헌신한 명문가

임면수 선생은 수원 출신의 애국계몽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로, 구한말 나라의 운명이 위태로웠던 시기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만주로 망명해 비밀거점을 운영하며 무장 독립운동을 지원했으며, 가족도 함께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그의 헌신은 수원 지역사회에 깊은 영향을 미쳤으며, 오늘날까지 그의 정신을 기리는 다양한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필동 임면수 선생. (수원특례시)
▲필동 임면수 선생. (수원특례시)
△시대의 어둠을 밝힌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

임면수는 151년 전인 1874년 6월 수원군 수원면 북수리 299번지에서 출생했다. 조선 말기 수원의 지역 유지 집안에서 2남으로 태어난 그는 전통적인 한문 공부를 하고 자랐다. 하지만 성인 이후에는 실용적인 근대 학문 수용에 뜻을 두었다. 서른살 만학도로 1903년 수원 양잠학교를 졸업하고, 일어 공부를 위해 사립 화성학교를 다니며 1905년 4월 1회 졸업생에 이름을 올렸다.

이후 서울 상동교회에서 운영한 중등 교육기관 상동청년학원의 야간학교에 다닌 임면수는 수원지역 애국계몽운동가로 명망을 떨쳤다. 대한제국기 수원지역의 다양한 조직과 단체에 임면수의 이름이 포함됐다. 고향인 수원에서 인재를 기르겠다는 의지로 수원지역 유지들과 힘을 합쳐 삼일학교 설립에 기여했고, 삼일학교 교감과 교장을 역임하며 사립학교 설립 운동을 후원하는 등 교육활동에 헌신했다. 특히 1907년에는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을 수원으로 확산시키는 중심축 역할을 했다. 이하영, 김재구 등과 함께 국채보상취지서를 작성해 이를 자비로 인쇄한 뒤 경기도 각 군에 배포하고 대한매일신보에 게재해 의연금을 모았다.

1910년 한일병합조약 체결은 임면수 활동의 전환점이 됐다. 조선이 일제에 의해 강점되자 신민회를 중심으로 애국지사들이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려는 뜻을 모았고, 이에 동참한 그는 만주로 망명을 결행했다. 1912년 2월, 가족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넌 그는 독립을 위한 무장 독립운동에 힘을 보탰다. 만주로 망명한 수원 출신 독립인사는 임면수가 유일하다고 알려져 있다.

만주에서 임면수는 주로 임필동이라는 가명을 사용했다. 신흥무관학교의 유지비와 군사훈련비를 조달하기 위해 동포들을 순방하며 동분서주하고, 경학사와 부민단 등 만주 한인 자치 조직에도 참여했다. 또 1910년대 중반에는 통화현 합니하에 설립된 민족학교 양성중학교 교장으로 활약했다.

▲1907년 3월2일 대한매일신보에 게재된 ‘국채보상취지서’에 임면수가 서기로 기록돼 있다. (수원특례시)
▲1907년 3월2일 대한매일신보에 게재된 ‘국채보상취지서’에 임면수가 서기로 기록돼 있다. (수원특례시)
결국 임면수는 1920년 해룡현에서 일본군 토벌대에 체포돼 조선으로 추방당했다. 철령으로 압송되던 중 한국인 경찰 유태철의 도움으로 탈출에 성공했다. 낮에 숨고 밤에 걸어 14일만에 길림성 농촌 마을에 은둔해 겨울을 났다. 그러나 1921년 길림시내에서 다시 활동을 하던 중 밀정의 고발로 길림 영사관에 체포돼 평양 감옥으로 압송됐다.

임면수는 고문과 매로 전신이 마비된 뒤에야 풀려나 반신불수가 된 채 고향으로 돌아왔다. 집은커녕 거처할 방조차 없었다. 하지만 의지는 그대로였다. 그는 거동이 가능할 정도로 회복한 뒤에도 사회와 교육을 위한 헌신을 지속했다. 아담스기념관 건립에 직접 감독관으로 참여해 삼일학교의 뿌리를 튼튼히 하는 등 교육가로 활동했다. 끝내 광복을 보지는 못한 채 1930년 11월 29일 56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임필동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던 임면수(아랫줄 오른쪽)의 체포 당시 사진. (수원특례시)
▲임필동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던 임면수(아랫줄 오른쪽)의 체포 당시 사진. (수원특례시)
△독립운동 명문가가 실천한 노블레스 오블리주

임면수는 애국계몽운동가 및 독립운동가로 활동하는 과정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인물이다. 어두운 시대를 밝히고, 지역의 인재를 키우고, 독립운동의 불꽃을 피우기 위해 사재를 내놓았을 뿐만 아니라 자신과 가족의 삶을 바쳤다.

임면수는 민족을 위해 자신의 재산을 쓰는데 아낌이 없었다. 1906년 샌프란시스코 대지진과 화재 참변으로 동포들이 어려움을 겪는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임면수는 모금 운동에 동참하고, 수원부 야소교회의 기부자 명단에도 이름을 올렸다. 1907년엔 수원에서 삼일학교 모금운동이 펼쳐졌는데, 이때에도 임면수는 기부에 참여했다.

또 삼일학교가 재정문제를 겪던 1908년에도 임면수는 기부에 적극 동참해 삼일학교를 중심으로 한 교육에 열의를 보였다. 특히 만주로 망명할 당시 희사한 부지에는 1913년 삼일여학교가 세워졌다. 임면수의 큰 뜻으로 많은 학생들이 교실과 운동장에서 걱정 없이 교육받을 수 있었던 셈이다.

임면수 본인 뿐만 아니라 그의 가족들도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먼저 임면수의 부인인 전현석(18711932)은 ‘독립운동가의 어머니’로 기억되는 인물이다. 임면수보다 세 살 연상으로, 1892년 결혼한 그는 가산을 정리하고 독립운동에 뜻을 품은 남편 임면수를 따라간 만주에서 독립운동의 뒷바라지를 했다.

만주 통화현, 해룡현 등지에서 객주업을 운영한 임면수의 집은 연락 거점이 되는 비밀기지나 다름없었다. 전현석은 이곳에 드나드는 독립군들을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하루 저녁에만 56차례 밥을 짓고, 아픈 동지에게 약을 달여 주고, 다친 동지의 붕대를 갈아 주고, 독립군의 무기를 맡아 두고, 해진 옷을 기워주는 등 독립운동가들의 어머니로 명성이 높았다.

‘당시 독립운동자로서 선생 댁에서 잠을 안 잔 이가 별로 없고, 전현석 여사의 손수 지은 밥을 안 먹은 이가 없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임면수와 전현석의 5남 2녀 중 장남 임우상(1893~1919) 역시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임우상은 약관의 나이로 부친을 도와 군자금 모집을 했고, 신흥무관학교의 교관으로 활동하며 독립운동가를 양성했다고 알려져 있다. 국내외 독립운동가들과 연계해 군수품 보급 등의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임우상은 1919년 수원으로 돌아와 김세환 등을 비밀리에 만나 군자금을 모아 서간도로 돌아가던 중 혹한을 이기지 못한 채 생을 마감했다.

▲이재준 수원시장이 지난해 3월 임면수 탄생 150주년을 기념해 동상에 헌화하고 있다. (수원특례시)
▲이재준 수원시장이 지난해 3월 임면수 탄생 150주년을 기념해 동상에 헌화하고 있다. (수원특례시)
△수원이 기억하는 임면수의 곧은 기개와 정신

1980년 대통령표창으로 독립유공자 등록됐던 임면수는 더 많은 업적의 발굴과 인정으로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수원 지역사회에서 임면수의 희생과 헌신을 기억하는 노력도 꾸준했다.

세류동 공동묘지에 안장됐던 그의 유골은 1964년 삼일상고 동산으로 옮겨졌고, 이후 현충원으로 이장돼 영면에 들었다. 대신 삼일동산에는 임면수의 호를 딴 ‘필동관’이라는 건물이 들어서 후학이 양성되고 있으며, 묘비는 수원박물관 야외로 옮겨져 그의 정신을 기리고 있다.

광복 70주년을 맞았던 2015년에는 수원에서 임면수에 대한 재조명이 본격화됐다. 학계와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독립운동가 필동 임면수 선생 기념사업추진위원회’가 조직됐고,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시민 성금 모금이 진행됐다. 총 1억원에 가까운 성금으로는 동상을 설치했다. 현재 수원시청 맞은편 올림픽공원에서 만날 수 있는 임면수 동상이 바로 그것이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당당하게 걷고 있는 모습의 임면수 동상은 일제에 맞선 그의 의지를 그대로 드러낸다.

2018년 광복절을 앞두고 수원시청 로비에 마련된 ‘수원시 명예의 전당’에도 임면수가 헌액됐다. 사진과 생애, 간략한 업적이 새겨진 동판을 명예의 전당에 걸어 감사함을 잊지 않고 수원시의 자긍심을 높이도록 했다.

지난해에는 임면수 탄생 150주년을 기념해 임면수를 기억하는 노력이 더해졌다. 수원박물관은 ‘필동 임면수, 시대의 부름에 답하다’라는 기획으로 찾아가는 전시회를 열었다. 임면수의 직계 후손인 임병무씨가 기증한 자료들이 주로 활용됐다. 또 11월 말에는 임면수의 생애와 독립운동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는 심포지엄을 개최해 그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노력을 지속하고 있다.

수원박물관 관계자는 “독립을 위해 자신의 전 재산과 삶을 바친 임면수 선생과 같은 순국 선열들이 있기에 광복 80주년인 오늘이 있다는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며 “수원 독립운동가들의 숨결을 간직하고 기억하며, 기록하는 일에 많은 시민들이 관심을 가져주시길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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