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연봉 협상을 마친 A증권사의 한 애널리스트는 요즘 밤잠을 설치고 있다.
기업분석 보고서 때문이 아니다. 독감에 걸려서도 아니다. 그 동안 밤을 세워가며 누구보다도 더 많은 기업 분석 리포트를 썼지만 연봉 협상 결과는 기대 이하였기 때문이다.
회사 측의 이유는 간단했다. 기업분석 리포트는 잘 썼는데 앞으론 리포트보다 영업에 치중하라는 것이었다.
물론 애널리스트의 업무 중 기관 투자자를 대상으로 법인 영업팀과 동반해서 프리젠테이션을 통해 의견을 제시하는 업무도 한다. 하지만 그 '정도'가 지나친 증권사들이 하나 둘 등장하고 있어 업계의 눈총을 받고 있다.
증권사 애널리스트는 일반적으로 1년 단위의 연봉 계약을 맺는다. 일종의 계약직인 셈이다.
시장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정도의 역량을 지닌 산업분야별 베스트 애널리스트들의 몸값은 연봉이 쉽게 1억원을 넘는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거액 연봉을 받는 애널리스트는 그리 많지 않다.
외부에서 보는 애널리스트라는 명함 뒤엔 그에 '걸맞은' 스트레스가 자리 잡고 있다.
출퇴근 시간도 정해져 있지 않다. 오전 7시 전에 출근해서 밤 10시까지 근무하는 것은 기본이고 툭하면 밤을 지새운다. 주말과 일요일에도 출근해서 리포트를 써야한다.
대부분 애널리스트는 자기 회사 법인영업부 거래고객인 기관투자가들의 보유 비중이 높은 종목에 대해 ‘매도’는 커녕 ‘중립’ 보고서를 내기도 쉽지 않다.
실질적으로 애널리스트의 ‘보유’ 의견이 곧 ‘매도’ 의견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증권사 애널리스트는 “법인영업팀으로부터 특정 업종에 대한 ‘비중확대’의견을 제시해 달라는 '압력'을 받은 적도 있다”며 “자신의 의견과 어긋나는 투자의견을 종용받아 고민을 한 적이 있다”고 전했다.
또 다른 증권사의 애널리스트는 “앞으론 자신도 법인 영업팀에게 잘 보여야 되겠다”며 “어떤 애널리스트는 밤을 새워 보고서를 쓰고도 인정을 못 받지만 어떤 애널리스트는 보고서는 뒷전에 미루고 법인영업팀과 어울려 다니면서 좋은 인사고과 점수로 고액 연봉을 받는다”고 꼬집었다.
결국 애널리스트의 능력이 기업분석보다 영업능력에 의해 좌우된다는 설명이다.
이렇다보니 업계에서는 애널리스트들이 특정 종목에 대해 '매도' 의견을 내는 경우는 1년에 한 두차례 있을까 말까다.
국내 증권사의 '매도' 보고서는 2001년 237개에서 2002년 74개, 2003년 33개로 급감한 뒤 2004년 89개로 늘었다가 다시 2005년 29개, 2006년 15개, 2007년 5개로 줄었다. 2008년엔 매도보고서가 한 건도 없었고 올해엔 삼성증권과 한화증권이 금호타이어에 대해 지난 5월 매도 의견을 낸 것이 전부다.
결국 이러한 증권업계의 사연을 모르고 '매수' 보고서만 보고 주식매매에 나서는 개인 투자자에게 피해가 전가될 수밖에 없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증권사의 입장에선 수익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점을 이해하지만 지나치게 영업을 위주로 한 전략은 중장기적으로 역효과를 입을 수 있다”며 “원칙적으로 보고서를 통해 애널리스트들이 소신있는 분석을 제시하고, 그 의견에 따른 객관적인 평가가 이뤄져야 신뢰를 더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