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대형 금융기관들이 잇따라 그리스 국채 보유규모를 공개하고 있다.
그리스가 국채 원리금 상환을 연기하더라도 영향이 없을 것이라는 점을 밝혀 투자자들을 안심시키기 위한 움직임으로 풀이된다.
그리스 국채 보유 규모를 공개한 금융기관 가운데 최대 보유기관은 지난 2008년 금융 위기 여파로 국유화된 독일의 히포레알에스테이트(HRE)와 코메르츠방크 산하의 유로히포인 것으로 나타났다.
유로히포는 31억유로(약 4조5510억원), HRE는 78억유로 규모의 그리스 국채를 각각 보유하고 있다. HRE뿐 아니라 제2의 그리스로 지목되고 있는 포르투갈 스페인 아일랜드 이탈리아 등 ‘PIIGS’ 국가에서 총 392억유로의 그리스 국채를 보유하고 있다.
17억유로 규모의 그리스 국채를 보유하고 있는 영국 로열뱅크오브스코틀랜드(RBS)는 그리스 국채 가격 급락으로 4월말 현재 4억3000만파운드의 손실이 발생했다고 발표했다.
앞서 지난 7일(현지시간) 파이낸셜타임스(FT)는 프랑스의 소시에테제네랄이 30억유로, BNP파리바가 50억유로 규모의 그리스 국채를 각각 보유하고 있다고 보도한 바 있다.
스페인의 방코산탄데르도 2억유로 규모의 그리스 국채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으며, 방코 빌바오 비스카야 아르헨타리아(BBVA)도 소규모의 그리스 국채를 안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유럽 대형금융기관들은 그리스 국채보유 규모와 이에 대한 디폴트(채무불이행) 우려로 4월 중순부터 주가가 큰 폭으로 하락했다.
금융기관끼리 단기자금을 주고받는 은행간 거래시장에서는 유럽의 일부 금융기관의 차입에 대해 대폭의 리스크 프리미엄을 요구하는 움직임도 확산되고 있다.
이는 그리스의 재정위기가 타국의 국가 재정에 미치는 직접적인 영향은 작을 수 있지만 투자자들의 국채시장 이탈이 지속될 경우 유럽 은행권에 심각한 사태를 불러올 수 있음을 나타내는 전조로 해석된다.
국제통화기금(IMF)과 유로존이 그리스에 1100억유로 규모의 긴급 구제금융을 결정한 목적은 그리스가 재정위기를 해결할 때까지 시간을 벌어 디폴트(채무불이행) 선언을 하지 않을 것을 보증해 국채시장을 안심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같은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는 평가다.
국제 신용평가사인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는 지난달 그리스의 국채 신용등급을 투기적 수준으로 하향한 것이 투자자들의 불안감을 극대화시켰다.
이어 지난 2일 1100억유로 규모의 구제금융이 발표된 이후 그리스의 3년 만기 국채수익률은 11%에서 17%로 뛰었다.
더 심각한 것은 투자자들의 안전자산 선호 심리가 극에 달하면서 다른 유로존 국가의 국채수익률이 상승했다는 점이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3년만기 국채수익률은 이달들어 한 주 동안 1% 이상 상승했다.
이런 상황에서 은행들이 투자자들의 불안감을 달래기 위해 나서는 것은 당연지사라는 지적이다.
은행들은 보유하고 있는 유로존 주요국 국채에서 발생한 손실과 그리스와 관련된 손실로 인해 직접적인 타격을 받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있다.
또 자금이 갑자기 바닥나 사업자금 조달조차 어려울 수 있다.
실제로 각국 중앙은행 관계자들은 투자자의 리스크를 비롯해 은행의 자금조달 시장 가뭄 등을 우려하고 있다고 FT는 지적했다.
FT에 따르면 유럽 은행권은 경기대응적 자본금 버퍼(완충)가 충분하지 않은데다 더 큰 문제는 각국 정부의 재정이 금융위기 때처럼 은행권에 구제금융을 투입할 수 있는 여건이 안 된다는 점이다.
또 일반 국민들 역시 혈세가 은행의 구제금융으로 또다시 흘러 들어가는 것을 바랄 리 없다.
유럽중앙은행(ECB)은 각국 정부의 재정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유통시장에서 국채를 매입하는 전례를 만들기를 꺼리고 있다.
따라서 현재 시장의 관심은 국채시장이 어떻게든 위기를 벗어나 유로존에 희소식을 가져다 주는 것이다. 다만 그런 상황이 보증되지 않은 이상 은행의 자금시장이 마를 경우의 차선책을 마련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FT는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