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전통적인 조선강국이었다. 섬나라라는 지리적 조건도 있었지만 꾸준한 노력이 일본을 조선강국으로 자리매김한 원동력으로 꼽힌다.
하지만 몇년 전부터 일본 조선산업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지속적인 기술개발로 무장한 한국 조선사들에게 그 자리를 내줄 수 밖에 없었다. 울산과 경남 거제 등 영남지방은 한국 조선산업의 메카로 자리매김했으며, 극지방에서 활용하기 위한 쇄빙선이나 FPSO(원유생산저장하역설비)와 같은 특수선박 제조기술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하지만 최근 중국의 조선산업이 눈부시게 발전하면서 한국이 차지하고 있는 세계 조선산업 맹주의 자리를 위협하고 있다.
반도체와 LCD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삼성과 LG 등 국내를 대표하는 기업들도 반도체와 LCD 분야에서 선진기술을 가지고 있던 일본의 ‘패스트팔로워(Fast Follower, 선도 기업과 기술을 벤치마킹해 빠르게 따라잡는 ‘신속한 추격자’)’ 전략을 그대로 사용함으로써 현재는 세계 반도체와 LCD 산업을 선도하고 있다.
이처럼 현재의 위상에 만족해 시대의 흐름을 선도하지 못하거나 기술개발을 소홀히 한다면 금세 다른 국가나 기업에게 ‘톱’의 위치를 내줄 수 밖에 없는 것이 글로벌 경영현장이다.
우리 기업들이 반도체, 조선, 2차전지 등 다양한 분야에서 각고의 노력 끝에 ‘글로벌 톱’의 자리에 올랐지만, 추격해오는 패스트 팔로워들의 성장세에 대비하지 못한다면 우리 또한 일본과 같은 신세에 처할 수 밖에 없다.
이에 프리미엄 석간 경제지 이투데이는 새해를 맞아 국내 산업계가 현재의 ‘글로벌 톱’ 지위를 유지하고 새롭게 ‘글로벌 톱’으로 도약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일본기업들의 과거 전략과 사례를 살펴본다.
(1) 2차 전지 일본 넘고 1위 간다
21세기 산업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올 기술은 바로 ‘2차전지’다. 스마트폰, 태블릿PC 등 모바일 혁명을 뒷받침하기 위해선 휴대성을 보장해 주는 2차전지가 필수이기 때문이다.
재충전을 할 수 있는 2차전지는 각종 전자기기의 심장으로도 불린다. 환경오염을 일으키는 가솔린 자동차의 대안으로 제시되는 전기 자동차에도 2차전지가 필요하다. 전기차용 배터리의 고성능과 긴수명이 바로 미래 전기 자동차의 운명을 결정지을 요소다.
시장조사기관 인포메이션 테크놀로지 종합연구소(IIT)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삼성SDI는 지난해 세계 리튬이온전지 시장에서 출하량 기준으로 20.1%의 점유율을 기록해 1위를 차지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동안 선두를 지켜온 산요전기는 19.9%의 점유율로 2위로 내려앉는 것이다. LG화학도 15.0%의 점유율로 2차전지사업 진출 이후 처음으로 소니(11.9%)를 제치며 3위에 올랐다.
삼성SDI와 LG화학을 합친 한국 기업의 점유율은 35%로 일본 기업(42%)을 바짝 추격하고 있어 조만간 국별 순위도 뒤집힐 전망이다. 10년 전에는 일본 기업이 94%, 한국 기업은 약 2%였다.
일본은 한국에 반도체와 액정화면(LCD)을 내준 후 2차전지를 지키기 위해 기술장벽을 친 채 안간힘을 써왔다. 하지만
일본의 마지막 보루인 2차전지도 한국기업들의 공세가 무너진 것이다.
과거 반도체와 LCD에서 성장 가능성을 믿고 투자한 결과 세계 1위 일본을 따라잡고 기술대국으로 성장했던 우리 기업이 2차전지에서도 같은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글로벌 2차전지 시장은 원천기술을 선점한 일본의 독무대였다. 지난 1991년도부터 산요와 파나소닉, 소니 등 일본 기업들은 성능과 가격 등 모든 면에서 다른 나라를 앞도하며 전 세계를 휩쓸었다.
반면 한국은 일본보다 10년 가량 늦게 시장에 뛰어들었다. LG화학이 1999년, 삼성SDI가 2000년에 2차전지 시장을 노크하며 후발 주자로서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이런 양상은 2차전지의 헤게모니가 니켈수소에서 리튬이온으로 넘어가면서 변했다. LG화학 삼성SDI 등 국내 업체들이 발 빠르게 리튬이온 전지에 대한 투자를 확대하면서 점유율을 빠르게 잠식하기 시작했다. 리튬이온전지는 노트북과 휴대전화에 주로 사용되는 2차전지로 현재 2차전지의 대세를 이루고 있다.
일본 업체들은 당시 세계시장을 주도하던 니켈수소전지에 주력했다. 반면 국내 기업들은 이를 포기하고 차세대 2차전지인 리튬이온전지 개발에 집중했다. 미래시장을 내다본 선제 기술 확보에 총력을 기울인 투자 판단이 성공한 것이다.
과거 소니는 음악플레이어 시장에서도 이와 같은 오판을 한 적이 있었다. 소니는 음악시장의 패러다임이 MP3 방식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간과한 채 자체 규격인 MD기술을 고집했다. 결국 소비자 외면당하자 뒤늦게 시장에 뛰어들었지만 때는 늦었다. 소니를 비롯한 일본 2차전지 업체가 이와 비슷한 실수를 반복한 것이다.
김지산 키움증권 애널리스트는 “정부가 2차전지 산업을 지원하고 나선 만큼 향후 메모리 반도체처럼 세계 시장의 절반 이상을 차지할 날도 머지않았다”고 전망했다. 2차전지 시장은 연평균 14%씩 성장, 오는 2015년에는 글로벌 시장에서 약 220억달러 규모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 이제는 전기자동차용 전지다= 국내 기업이 급성장하고 있는 리튬이온전지는 전기자동차용 전지 시장이 본격화되면 더 위력을 떨치게 된다. 리튬이온전지 시장은 5년 뒤에 지금의 4배인 50조원 규모로 커질 것으로 전망되고 있고, 이중 40% 가량이 전기 자동차용이다.
LG화학은 지난해 세계 최초 양산형 전기자동차인 GM의 시보레 볼트용 리튬이온 배터리 단독 공급업체로 선정된 것을 시작으로 현대·기아차, CT&T, 미국 상용차 부품업체 이튼(Eaton), 중국 메이저 자동차 업체인 장안기차 및 유럽의 볼보(Volve) 등과 공급계약을 맺었다.
또 GM과 더불어 미국 빅3 자동차 업체 중 하나인 미국 포드가 올해부터 양산 판매할 순수 전기자동차인 ‘Focus’용 리튬이온 배터리 공급업체로도 선정돼 세계 최대 전기자동차 시장인 미국 공략을 위한 의미있는 전초기지를 확보했다.
LG화학은 최근 유럽의 자동차 명가인 르노에서 진행하고 있는 초대형 ‘순수 전기차 프로젝트’에 탑재될 리튬이온 2차전지 공급업체로 선정됐다. 유럽에서도 메이저 고객사를 확보, 세계 시장을 선도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특히 지난 7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기공식에 참석해 화제가 된 미시간주 홀랜드 공장은 오는 2013년까지 약 3억달러를 투자해 연간 2000만셀을 공급할 수 있는 생산능력을 갖출 예정이다.
LG화학 중대형전지 생산담당 김현철 수석부장은 “LG화학은 지난 10여년 이상 소형 리튬이온 배터리를 양산해왔고 지난해에는 현대차 아반떼 하이브리드카용 공급을 위해 세계 최초로 전기차용 리튬이온 배터리 생산시설을 구축하며 노하우를 쌓아왔다”며“이러한 노하우를 바탕으로 가장 중요한 공정인 전극 제조공정에 있어 경쟁사 대비 평균 30% 이상 뛰어난 생산효율을 갖추는 등 세계 최고의 생산성을 확보한 상태”라고 강조했다.
삼성SDI는 전기차용 전지업계에 뒤늦게 진입했지만, IT전지 시장의 경험과 기술력을 살려 전기차 배터리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특히 독일 보쉬와의 합작사인 SB리모티브를 통해 미국의 자동차 업체 크라이슬러를 비롯해 BMW, 델파이 등에 제품을 공급하는 등 전기차 시장 진출을 가속화하고 있다.
삼성SDI와 독일 보쉬의 합작사인 SB리모티브는 지난해 울산에 전기자동차용 배터리 전용 생산 라인 준공식을 실시하고 제품 양산을 위한 준비를 마쳤다. 이 공장에서는 하이브리드와 전기차동차용 리튬이온 배터리를 생산할 계획이다. 새롭게 준공된 전용라인은 3만4000㎡의 규모로 지난 2009년 9월 착공해 9개월 만에 완공됐다.
초기에는 시양산용 배터리 생산을 시작하고 올해 초부터 대량 양산 체제에 돌입할 예정이다. SB리모티브는 오는 2015년까지 생산규모를 연간 전기차 18만대분(4GWh)까지 늘려나갈 계획이다. 2015년을 기해 전기차용 2차전지 시장에서 세계 점유율 30%를 달성해 자동차 전지업계의 글로벌 리더로 발돋움한다는 목표다.
SK에너지도 순수 국산 전기자동차의 배터리 공급업체로 선정되는 등 전기차 사업에 속도를 내고 있다. 이 회사는 지난해말 현대차의 첫 순수 고속 전기차로 양산 예정인 i-10 기반의 블루온(Blue-On) 모델과 기아차 기반의 차기 양산 모델의 배터리 공급업체로 공식 선정됐다.
불과 10년 만에 일본의 아성을 무너뜨린 것이다. 그러나 우리 기업들도 일본 기업의 예처럼 미래 예측에 실패한다면 일본 기업들의 전철을 밟을 수 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