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정부 4년 동안 가장 낮은 평가를 받는 것이 바로 양극화 문제다.
20~30대 청년실업으로‘88만원 세대’는 지속적으로 늘어 났으며, 이는 양극화에 희생된 청년들의 상징이 됐다. 정권초기 야심차게 밀어붙이 747 공약은 조롱거리로 전락했고, 계속된 비판은 임기 후반에 들어서 정책 변화를 가져왔다.
기존의 친 재벌 정책에서 선회해 ‘동반성장’과 ‘상생’을 내세우며 무너진 민심잡기에 나선 것이다. 하지만 경제위기와 함께 무너진 중산층과 돌아선 민심은 돌이키기 어려웠다. 이 같은 분위기로 인해 올해 총선과 대선에서 ‘경제민주화’는 뜨거운 감자로 자연스럽게 자리 잡았다.
분배구조의 악화는 양극화를 가속시켜 중산층 몰락이라는 결과를 이끌었다. 이는 국민들의 교육비 지출만 봐도 한눈에 알 수 있다. 작년 삼성경제연구소가 발표한 ‘한국 가계의 소비지출 구조와 물가’ 보고서를 살펴보면 최상위층인 소득 5분위 계층의 교육비 비중은 2008년 14.6%에서 2010년 15.4%로 증가한 반면, 최하위층인 소득 1분위 계층의 비중은 2008년 8.8%에서 2010년 7.8%로 감소했다. 소득 분위별 격차가 점점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중산층이 무너지자 곧바로 정권에 대한 지지율 하락으로 이어졌다. 지난 4월 여론조사 전문기관 리얼미터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이 대통령의 지지율은 4주 연속 하락해 28%를 기록했다. 여기에 임기 말 ‘내곡동 사저’ 논란과 ‘민간인 사찰’, ‘저축은행 비리’ 등 굵직한 사건들이 실체를 드러내면서 MB 정권은 진퇴양난에 빠지고 있다.
이 같은 일련의 과정을 거쳐 지난 2010년 9월 MB 정부는 정책의 대 전환을 시도한다. 이 대통령은 주요 기업 최고경영자와 중소 협력사 대표, 5대 경제단체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대-중소기업 동반성장 추진대책’을 확정했다. 기존의 ‘비즈니스 프렌들리’에서 민심을 겨냥한 ‘동반성장’ 카드를 꺼내든 것이다. 그리고 전달인 8월 국무총리직에서 물러난 정운찬 전 동반성장위원장이 초대로 동반성장위원회를 이끌게 됐다.
◇‘경제민주화’ 대선의 핫이슈로 이어져 = 동반성장은 초반부터 난항을 겪었다. 시장자율을 전제로 동반성장을 이끈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야심차게 출범한 동반성장위원회의 수장 정 전 위원장은 ‘이익공유제’, ‘중소기업 적합업종 선정’ 등 정책을 내놓았지만, 중소기업의 요구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게다가 정책을 시행하는 과정에서도 전국경제인연합회를 중심으로 지난해 말 회의에 불참하는 등 진통을 겪어야 했다.
정 전 위원장은 결국 6월 “올해 초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동반성장위를 전폭적으로 지원해줄 것을 요청했으나 아무 대답이 없어 위원장직을 그만뒀다”고 밝히며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스스로 사퇴했다. 그는 퇴임과 함께 “지금 대기업은 투자할 곳이 없어 돈을 쌓아두고 있지만 중소기업은 돈이 없어 쩔쩔매는 것이 한국의 현실”이라고 비판했다.
정 전 위원장의 사퇴는 이 대통령의 동반성장에 대한 의지에 의구심을 남겼다. 더구나 어설픈 동반성장 정책의 ‘절반의 성공’은 국민들로 하여금 좀 더 제대로 된 상생의 문화를 요구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동반성장을 통해 납품단가 후려치기 등의 부당한 관행이 바로잡히길 바라던 중소기업과 서민들의 실망감은 높아만 갔다.
이 같은 실망으로 인해 사회 전체적으로 양극화에 대한 문제의식이 조성되기 시작했다. 특히 올해 초 재벌들이 떡복이, 빵집 등 소상공인의 영역까지 손을 뻗히던 이른바 ‘재벌 빵집’의 논란이 한 차례 휩쓸고 간 이후 정치권은 발 빠르게 사회의 불만을 잡아내 표면 밖으로 끄집어내기 시작했다. 이는 지난 4월 총선의 핫이슈였던 ‘경제민주화’ 논의로 이어졌다. 여야는 경쟁하듯 경제민주화에 대한 정책을 꺼내들었고 설익은 정책들의 과열된 경쟁이 이어졌다.
하지만 재계는 이에 강력하게 반발하며 쉽게 물러서지 않으려 들고 있다. 동반성장을 조금씩 받아들이며 문화 조성에 동참하기 시작했지만 ‘재벌개혁’을 앞세운 경제민주화에는 공감하기 어렵다는 분위기다. 특히 ‘출자총액제한제’ 부활과 ‘순환출자’ 금지와 같은 민감한 문제가 얽혀있어 갑론을박이 이어지고 있다. 정치권에서도 개념정립에 대한 의견이 분분해 이 같은 비판에 힘을 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