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우리 정부의 수해지원 제안에 대해 수용과 거부를 오가면서 그 배경에 관심이 모이고 있다. 수해지원 거부 이유는 표면적으로는 남측이 지원하겠다고 하는 품목에 대한 불만이다.
정부는 11일 전화통지문에서 밀가루 1만톤과 라면 300만개, 의약품ㆍ기타 물품 등을 되도록 이른 시일 내에 보내겠다는 뜻을 밝혔다.
북한이 지난 10일 지원 수용 의사를 밝히면서 "작년과 같은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지난해 정부가 지원하겠다고 했던 영유아용 영양식, 과자, 초코파이, 라면 등 대신 쌀과 자재 장비의 지원을 요구한 셈이다.
북측은 지난해 식량, 시멘트, 복구 장비 등을 통 크게 지원해달라고 요구했고 결국 자신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지원 거부 의사를 밝힌 것으로 보인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는 "정부는 적어도 쌀이나 시멘트 등에 대한 지원의사가 없으면 북한이 우리 측의 지원 제안을 수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은 알고 있었을 것"이라며 "이번 지원 제안이 내부적으로 전략적 검토가 이뤄지고서 나온 것인지 의문스럽다"고 지적했다.
겉으로는 지원 품목을 둘러싼 남북 간의 견해차지만 북한은 품목을 통해 남북관계 개선에 대한 우리 정부의 진정성을 가늠하려고 했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
북한은 지난달 우리 정부의 이산가족 상봉 제안에 대해 5·24조치의 해제와 금강산 관광 재개를 전제조건으로 내세웠다.
정부가 수용하기 어려운 조건을 내건 것이기는 하지만 이 두 문제에서 진전이 있으면 이산가족 상봉을 할 수도 있다는 신호를 보낸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북한도 마냥 남북관계를 틀어막고 있지는 않겠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경제시스템의 변화를 추구하고 북중 특구개발에 속도를 내며 미국, 일본과 관계개선을 추구하는 북한으로서도 남북관계 변화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또 대선을 앞둔 남한 정치계에서 대북정책 전환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는 점도 북한의 기대를 키웠을 수 있다.
따라서 이번 수해 지원이 북한의 의도한 품목 지원이 전달되면 추후 남북간의 다양한 대화를 통해 관계 개선을 노렸을 수 있다는 것이다.
1984년 남쪽에서 수해가 발생하자 북한은 '생색내기' 차원에서 쌀과 시멘트 등의 지원을 남한 정부에 제안했지만, 당시 전두환 대통령이 이를 전격 수용했고 이후 북측의 지원은 적십자회담과 고향방문단 교환으로 이어지며 남북 당국간 최초의 경제회담까지 열렸다.
결국 북한 입장에서는 이번 수해지원 품목을 통해 남북관계에 대한 우리 정부의 태도를 재확인하고 마지막 기대를 접은 것으로 관측된다. 따라서 앞으로 대남 공세는 더욱 강화될 공산이 크다.
김연철 인제대 통일학부 교수는 "어쩌면 이명박 정부에서 이번 수해 지원이 꼬인 남북관계를 풀 마지막 기회였다"며 "수해지원이 무산되면서 이제 냉각된 남북관계를 풀어야 하는 짐은 차기 정부로 넘어가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북한 경제에 대한 중국의 공세적 투자가 가속되는 상황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번 기회에 남북관계를 조금이라도 풀었어야 다음 정부의 부담을 덜 수 있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