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웅진을 시작으로 지난해 STX·동양그룹을 한순간에 해체시킨 유동성 위기가 동부그룹에 재현될 조짐이다.
현재 김 회장의 심경은 복잡하다. 지난해 11월 2조7000억원 규모의 재무구조개선 자구책을 내놓을 때와 분위기가 매우 다르다. 금융계열과 함께 동부그룹을 지탱하는 또 하나의 축인 제조업부문이 해체될 중대 위기에 직면했다.
동부제철 자율협약 추진은 제조업부문 지주회사인 동부CNI의 자금 경색, 동부하이텍 매각 잠정 중단까지 계열사에 연쇄적으로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동부하이텍 매각은 동부그룹 정상화 자구 계획의 핵심 사안이다. 동부하이텍은 국내 최대의 비메모리 반도체 업체이자, 김 회장이 지난 15년간 3500억원가량의 개인 재산을 털어넣으며 공들인 회사다. 동부가 지금까지 이 회사에 투자한 돈만 3조원에 이르지만 김 회장은 재무건전성 확보를 위해 과감히 포기했다.
하지만 동부제철과 채권단의 자율협약 체결이 난항을 겪으면서 동부하이텍의 매각 일정도 잠정 중단됐다.
동부하이텍 매각 주관사 관계자는 27일 “동부제철의 자율협약 체결 여부를 지켜봐야 하기 때문에 동부하이텍의 매각 진행은 현재 모두 멈춘 상태”라고 밝혔다.
당초 동부하이텍 매각 주관사인 KDB산업은행과 노무라증권은 이번주 1차 인수의향서를 제출한 세 곳에서 동부하이텍의 실사를 벌이게 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동부제철의 자율협약 체결이란 변수가 생기면서 향후 일정을 잡지 못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8600억원에 달하는 동부하이텍의 부채 정리 방안이 확정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매각 주관사는 투자자에게 투자안내서(IM)를 발송할 때 동부하이텍의 부채와 보유 지분을 모두 정리하는 조건으로 안내했지만 자금 부담이 만만치 않다.
일각에서는 동부그룹 정상화 계획이 순식간에 틀어지자 동부제철, 동부CNI가 채무불이행으로 조만간 채권단의 관리를 받게 될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업계는 동부그룹의 상황이 점점 나빠지자 웅진홀딩스의 기업회생절차(법정관리) 신청이 그룹 해체까지 이른 2012년 웅진사태가 재현될까 걱정스러운 시선을 보내고 있다. 당시 웅진그룹은 알짜 계열사인 웅진코웨이(현 코웨이), 웅진케미칼(현 도레이케미칼), 웅진식품 등을 줄줄이 매각했다. 14개 계열사를 거느린 재계 30위 그룹이 지주회사의 자금난으로 인해 한순간에 무너졌다.
동부그룹의 제조업부문도 이와 비슷한 상황이다. 동부제철(14.02%), 동부하이텍(12.43%), 동부건설(22.01%), 동부팜한농(36.8%) 등 제조업 계열사 지배구조의 정점에 있는 동부CNI는 사실상 다음달 만기 도래하는 회사채(500억원 규모)를 해결하지 못하게 됐다. 동부 측은 어떻게든 동부CNI가 채무불이행으로 가는 길을 막으려 하지만 뾰족한 방법이 없는 상황이다.
동부CNI 지원 문제를 두고 김 회장의 사재 출연 문제와 장남 남호씨의 동부화재 지분 담보 제공 문제를 두고 동부와 채권단이 여전히 평행선을 걷고 있다. 김 회장이 끝까지 금융계열사 지분을 내놓지 않을 경우 윤석금·강덕수·현재현 회장의 ‘데자뷰’가 될 수 있다. 경영자로서 최대의 고비를 맞은 김 회장이 또다시 선택의 기로에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