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철순의 즐거운 세상] 당신의 ( )가 좋아요, 그냥

입력 2015-01-16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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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설계연구원장

새해를 맞아 서울도서관의 이마에 새로운 문구가 등장했다. 이른바 ‘꿈새김판’에 오른 문구는 ‘당신의 ( )가 좋아요, 그냥’이다. 괄호 속을 채워 마음을 표현해 보라는 문구다. 새로운 마음으로 2015년을 맞은 사람들에게 칭찬과 격려로 용기를 불어넣어 주기 위해 시민 공모를 통해 선정한 말이라고 한다.

2013년 6월에 첫선을 보인 꿈새김판에는 그동안 여러 가지 말이 올랐다. ‘보고 싶다. 오늘은 꼭 먼저 연락할게’라고 하더니 지난해 4월 세월호 사고 이후에는 ‘마지막 한 분까지 세월호 실종자 모두 가족 품으로 돌아오길 간절히 기원합니다’라고 빌었다. 연말에는 힘든 일을 견딘 사람들을 ‘토닥토닥’ 단 네 글자로 위로해 주었다. 이어 이번 글이 등장했다.

그런데 긴급 이의가 있다. 토씨를 ‘가’로 한정하고 보니 괄호 안에 넣을 수 있는 말이 급(!) 제한된다. 예컨대 머리나 두뇌를 넣을 수는 있지만 머리카락이나 머리칼처럼 받침이 있는 단어는 넣을 수 없다. 당신의 귀나 귀지, 코나 코딱지는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지만 당신의 눈이나 눈물, 입이나 입술은 좋아할 방법이 없다. 다리나 배는 좋아할 수 있지만 발과 가슴은 절대로 안 된다(잘못하면 큰일 난다).

앞에 한 말 중에서 귀를 좋아한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런 말이 가능하기는 할까? 어떤 사람은 상대방에 대한 경청과 소통을 강조하는 취지에서 “Happy new Year!”를 “Happy new Ear!”라고 바꿔 쓰던데, 그런 의미에서라면 귀를 좋아한다는 말도 할 수 있겠지. 하지만 좀 어색한 건 사실이다.

우리나라 토씨에는 ‘은 는 이 가’ 네 가지가 있고, 이 중에서 절대격 조사로 분류되는 ‘은’과 ‘는’은 다른 두 가지보다 훨씬 힘이 세고 독립적이며 배타적이다. 예를 들어 “당신의 (자동차)는 좋아요, 그냥” 이렇게 말한다면 자동차 말고 다른 건 영 젬병이라는 뜻이 된다. “당신의 (헤어 스타일)은 좋아요, 그냥” 이렇게 받침이 있는 말을 넣어 봐도 기분 좋게 들리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은’과 ‘는’을 배제한 건 아주 잘 한 건데, ‘가’만 넣은 것은 잘못이다. ‘당신의 ( )가(이) 좋아요, 그냥’, 이렇게 두 가지를 다 써놓아야 했다. 아이들 시험문제도 그렇게 낸다. 그래야 나는 당신의 미소, 당신의 재치, 당신의 유머, 당신의 용기, 당신의 목소리와 함께 당신의 친절과 성실, 사랑, 보살핌, 눈빛이 좋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하다못해 당신의 집안이나 돈 부동산이 좋다는 말도 슬그머니 할 수 있지 않겠나?

꿈새김판의 취지를 뻔히 알면서 왜 이렇게 따지고 비트느냐고? 그냥 좋다고 말해 보자는 건데 골치 아프게 그러지 말고 그냥 좋은 걸 생각해 보시라고? 이 세상에 그냥 좋은 게 뭘까? 그런 게 얼마나 있을까? 언제나 애틋하고 그리운 엄마, 마음을 주고받게 된 그녀의 첫 편지, 창문을 여니 눈에 가득 차는 첫눈, 일어나 걸으려고 애쓰는 아기, 아직 눈도 못 뜨고 곰실거리는 강아지들, 자세히 보고 오래 보지 않아도 사랑스럽고 예쁜 풀꽃, 어린 짐승들 다 제자리 찾아갔는지 살피느라 서산에 걸려 있는 해, 애달픈 그리움에 뭍으로 뭍으로만 밀려오는 파도, 이런 것들?

그런데 이렇게 그냥 좋은 걸 말하는 게 아니라 당신의 뭐가 좋다고 구체적으로 진술해야 하니 그게 힘든 일 아닌가? 좌우간 각자 써 넣어 보시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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