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동진(東晋)시대의 왕휘지(王徽之·출생 미상~383년경 사망)는 서성(書聖) 왕희지(王羲之·307~365)의 다섯째 아들이다. 자는 자유(子猷). 관직은 황문시랑(黃門侍郞)에 이르렀고, 아버지에게서 서예를 배워 행서와 초서를 잘 썼다.
절강성(浙江省) 회계산(會稽山)의 북쪽 산음(山陰)에 살던 그는 눈 내리는 밤에 혼자 술을 마시며 좌사(左思)의 ‘초은시(招隱詩)’를 읊조리다가 갑자기 섬계(剡溪)에 사는 친구 대규(戴逵)가 생각났다. 대규의 자(字)는 안도(安道). 왕휘지가 살던 곳은 현재의 소흥(紹興)이며 섬계는 조아강(曹娥江)의 상류인데, 같은 절강성이지만 가까운 거리는 아니다.
친구를 찾아가려고 한밤중에 배를 탄 왕휘지는 대규의 집 앞에 이르렀을 때 들어가지도 않고 되돌아왔다. 남들이 이상하게 여겨 이유를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내 본래 흥이 일어 갔다가 흥이 다해 돌아가는데 굳이 안도를 만날 게 있겠는가?”[吾本 乘興而行 興盡而返 何必見戴安道耶] ‘세설신어’(世說新語)에 나오는 이야기다.
풍류인이었던 왕휘지는 일화가 많다. 기병참군(騎兵參軍)이면서도 병마의 수나 업무에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머리는 늘 더부룩하고 옷차림은 흐트러진 모습이었다. 대나무를 몹시 사랑해 “하루도 대가 없으면 살 수 없다”는 말도 했다. 그와 달리 대규는 조정의 부름을 받고도 벼슬길에 나가지 않은 사람이다.
왕휘지가 돌아간 것은 눈이 그쳐 흥이 다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는데, 이 일에서 생긴 성어가 산음승흥(山陰乘興), 흥이 일어 친구를 만나러 간다는 말이다. 그 이후 시에 섬계를 넣거나 눈 속에 친구를 찾아가는 고사인물화를 그린 사람들이 많다. 섬계를 아호로 지은 이도 있다. 목은 이색도 벼슬에 얽매인 자신을 벼슬 없는 친구가 그리워 찾아간 왕휘지에 비유한 시를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