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철순 칼럼] 나무를 껴안으며

입력 2015-03-24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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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필 겸 미래설계연구원장

봄은 보얗다. 그리고 보드랍다. 봄은 이제 보는 곳마다 와 있다. 봄이 ‘보다’라는 동사에서 나왔다는 말은 근거 없는 주장이라지만, 남녘을 찾아간 나그네는 그렇게 믿고 싶어진다. 이 소생과 부활의 계절에 모든 생명에 물이 오르고 움과 싹이 돋고 꽃이 피고 있다.

구례 화엄사 뒷산에 서 있는 백매 홍매와 이우는 동백은 파란 하늘과 함께 청백적홍 네 가지 색을 절묘하게 조화시키고 있다. 그냥 꽃보다는 꽃나무가 좋다. 나이 들수록 나무가 더 좋아지는 것은 나무가 사람과 닮았기 때문 아닐까. 한광일의 동시 ‘생각하는 나무’를 읽는다. ‘나뭇잎은 어쩌면/나무들의/생각인지도 몰라/봄/뾰족뾰족/돋는 생각/여름/푸릇푸릇/펼쳐낸 생각/가을/알록달록/재미난 생각/‘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온갖 생각/다 떨쳐버리고/다시 생각에 잠기는/겨울’

나무의 획은 자연스럽다. 어떤 명필도 그렇게 맑고 무심한 획을 긋지 못할 것 같다. 나무는 자연스러운 완성이다. 나무는 죽지 않는다. 화엄사 구층암의 요사채에는 처마를 받친 모과나무가 있다. 뜰에 서 있을 때 모과 향기를 내더니 이제는 탄탄한 기둥이 되었다. 밑동은 주춧돌에 뿌리를 내리고, 위는 서까래를 받치느라 여전히 힘을 내며 서 있다.

구례 5일장의 주역은 할머니들이다. 그 나이 든 분들이 없으면 장에 활기가 없다. 늙음이 있어야 활기가 돈다니 묘한 일 아닌가. 나무도 오래된 것일수록 가지가 많고 그늘이 크다.

미국 시인 조이스 킬머가 이미 다 말했다. ‘이 세상에 나무처럼 아름다운 시는 없으리/단물 흐르는 대지의 젖가슴에/마른 입술을 대고 서 있는 나무/온종일 신을 우러러보며/잎이 무성한 팔을 들어 기도하는 나무/여름엔 머리칼에 방울새의 보금자리를 치는 나무/가슴에는 눈이 쌓이는 나무/비와 더불어 다정하게 살아가는 나무/나처럼 어리석은 이도 시는 쓰지만/나무를 만드는 건 오직 신만이 하는 일.’ (‘나무들’ 전문) 무슨 말을 더 보태랴.

세계 산림의 날인 지난 21일 국립수목원에서는 1226명이 ‘1분 이상 나무 안아 주기’를 했다. 1970년대 인도에서 시작된 ‘tree hug’다. 안는 것, 껴안는 것, 그러안는 것, 끌어안는 것, 부둥켜안는 것, 어떻게 안든 모두 사랑과 교감의 포옹이다.

인간이 나무를 좋아하는 것은 늘 그 자리에 서 있기 때문이 아닐까. 누구의 말인지 잊었지만 나무는 아파도 서서 앓는다. 생 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서 사람들이 어디 있느냐는 물음에 꽃은 “대상(隊商) 예닐곱 명이 지나가는 걸 봤지만 바람에 불려 돌아다니니 어딜 가야 만날지 알 수 없다”고 대답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뿌리가 없어 많은 불편을 느낀다고 알려준다. 식물이 보기에 인간은 뿌리가 없어 불편한 존재다.

사람들은 나무를 안아주었다지만 안아준 것은 오히려 나무다. 김형영의 시 ‘쉬었다 가자’를 본다. ‘내가 날마다 오르는 관악산 중턱에는/백년 된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데요/내 팔을 다 벌려도 안을 수가 없어서/못이긴 척 가만히 안기지요./껍질은 두껍고 거칠지만 할머니 마음같이 포근하지요.//소나무 곁에는 벚나무도 자라고 있는데요/아직은 젊고 허리가 가늘어서 내가 꼭 감싸주지요./손주를 안아주듯 그렇게요.//(하략)

안아주고 안기는 교감 속에 사람은 나이 들고 성숙해진다. ‘정녕 나무는 내가 안은 게 아니라/나무가 나를 제 몸같이 안아주나니,/산에 오르다 숨이 차거든/나무에 기대어/나무와 함께/나무 안에서/나무와 하나 되어 쉬었다 가자.’(김형영 ‘나무 안에서’ 중 )

나무가 사람이고 사람이 나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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