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 금메달을 목표하던 두 마라토너가 있었다. 이봉주와 황영조다. 한국 스포츠사를 대표하는 라이벌로 손꼽히는 두 선수는 1970년생 동갑내기로 1990년대 한국 마라톤 중흥을 이끈 주인공이다.
하지만 두 사람의 라이벌 관계는 길지 않았다. 고교 시절까지 라이벌이던 두 선수는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을 계기로 운명이 바뀌었다. 황영조는 몬주익 언덕의 기적을 연출하며 고(故) 손기정(1936년 베를린올림픽 금메달) 옹에 이어 56년 만에 조국에 금메달을 안긴 반면, 이봉주는 무릎 부상으로 올림픽 출전이 무산됐다.
황영조는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에서도 금메달을 따내며 전성기를 이어갔다. 그러나 황영조는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을 앞두고 26세라는 이른 나이에 은퇴를 선언했다. 천재형 마라토너 황영조는 그렇게 팬들의 곁을 너무나도 쉽게 떠나갔다.
황영조의 조기 은퇴는 오랜 슬럼프를 겪던 이봉주에게 기회라는 메시지로 다가왔다. 이봉주는 꿈에 그리던 올림픽 금메달을 위해 강도 높은 훈련을 이어갔다. 결과는 3초 차 아쉬운 은메달이었다. 그러나 이봉주 시대는 이때부터였다.
이봉주는 1998년 방콕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획득했고, 2000년에는 시드니 올림픽 출전 티켓이 걸린 일본 도쿄 국제마라톤에서 2시간 7분 20초(한국 신기록)로 2위에 올랐다. 이 기록은 15년이 지난 지금도 불멸의 기록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불운도 찾아왔다. 시드니 올림픽 금메달을 노리던 이봉주는 15㎞ 지점에서 넘어져 24위(2시간 17분 57초)에 머물렀다. 그러나 이봉주에게 좌절은 없었다. 이듬해인 2001년 보스턴 마라톤대회에 출전, 가장 먼저 결승 테이프를 끊었다.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에서는 아시안게임 2연패를 달성했고, 2004년 아테네 올림픽과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도 태극마크를 달고 달렸다.
그리고 2009년 대전 전국체전에서는 마흔한 살의 나이로 41번째 풀코스를 우승으로 장식했다. 그것이 ‘국민 마라토너’ 이봉주의 마지막 레이스였다. 이봉주는 이 레이스를 끝으로 자신의 마라톤 인생에 마침표를 찍었다.
영원히 멈추지 않을 것 같았던 ‘봉달이’의 역주는 황영조의 조기 은퇴에 대한 미련과 아쉬움이 있었기에 더 크고 위대했다. 20년 동안 41번의 마라톤 풀코스 완주와 올림픽 4회 연속 출전, 그리고 불멸의 한국기록까지 한국 스포츠사에 이봉주라는 이름 석 자가 지워질 수 없는 이유는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