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용(中庸)’ 제15장에 이런 글이 있다. “군자의 도는 비유컨대 먼 곳을 감에는 반드시 가까운 곳에서 출발하고, 높은 곳에 오름에는 반드시 낮은 곳에서 출발함과 같다. 시경에 ‘처자의 어울림이 거문고를 타듯 하고 형제는 뜻이 맞아 화합하며 즐겁구나. 너의 집안 화목케 하며 너의 처자 즐거우리’라고 했다. 공자는 ‘부모는 참 안락하시겠다’고 했다.”[君子之道 辟如行遠必自邇 辟如登高必自卑 詩曰 妻子好合 如鼓瑟琴 兄弟旣翕 和樂且眈 宣爾室家 樂爾妻帑 子曰 父母其順矣乎] 등고자비(登高自卑)나 행원자이(行遠自邇)는 모든 일을 기본이 되는 것부터 이루어가야 한다는 뜻이다.
조선 후기 문신 윤기(尹愭•1741∼1826)의 무명자집(無名子集)에 이 대목에 대한 문답이 실려 있다. 정조는 경연에서 경사(經史) 강의를 할 때 중용의 주요 쟁점을 물었고, 이를 생원진사들의 과거시험에 냈다. 윤기는 차상(次上)으로 뽑혔다. 답안지에 매기는 등급은 상상 상중 상하, 이상(二上) 이중(二中) 이하(二下), 삼상(三上) 삼중(三中) 삼하(三下), 차상 차중 차하로 나뉘어 있었다.
정조의 질문은 예리하다. “먼 곳에 갈 때 가까운 곳에서 시작하고 높은 곳에 올라갈 때 낮은 곳에서 시작한다는 뜻을 단지 처자와 형제의 예로 밝힌 것은 어째서인가?”
윤기의 답안은 이렇다. “이 글은 자사(子思)의 말을 계기로 시경과 공자의 말을 인용해 의미를 밝힌 것이지 오륜으로 말한 게 아닙니다. 형제와 처자는 범위로는 한집안 가족이요 일로는 일상생활이므로 군신이나 붕우에 비해 더 절실하고 가까우니 어찌 가까운 곳에서 시작하고 낮은 곳에서 시작하는 도가 아니겠습니까? 문왕도 ‘아내에게 모범이 되어 형제에 이른다’[刑于寡妻 至于兄弟]고 한 걸 보면, 자사가 시를 인용해 공자의 말씀에 미친 것은 절실하고 분명하다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