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로 보는 경제 톡] 콧대 높던 호텔ㆍ백화점 무릎 꿇게 한 ‘가성비’

입력 2016-03-09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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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침체에도 불구하고 편의점 업계가 지난해 함박웃음을 지었습니다. 도시락 등 PB상품이 불티나게 팔린 덕이죠. 이 때문에 '혜자스럽다(가성비가 뛰어나다)'는 신조어까지 생겨났습니다.(뉴시스)
▲경기침체에도 불구하고 편의점 업계가 지난해 함박웃음을 지었습니다. 도시락 등 PB상품이 불티나게 팔린 덕이죠. 이 때문에 '혜자스럽다(가성비가 뛰어나다)'는 신조어까지 생겨났습니다.(뉴시스)

얼마 전 미샤에서 ‘보랏빛 앰플(나이트 리페어 사이언스 액티베이터)’을 샀습니다. 30% 할인을 받아 2만6400원에 득템했죠. 50㎖에 15만원 하는 에스티로더 ‘갈색병(어드밴스드 나이트 리페어 싱크로나이즈드 리커버리 콤플렉스)’을 살까 고민했는데 친구가 두 병째 쓰고 있다며 강추를 하더군요. 트러블이 잘 나는 피부라 고민을 했지만, 가성비(가격대비 성능비)가 좋다는 친구의 말을 믿어보기로 했습니다. 사흘째 아침저녁으로 바르고 있는데 꽤 촉촉합니다. 아직까진 만족스럽네요.

대학에 다니던 20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제 쇼핑의 기준은 메이커였습니다. ‘싼 게 비지떡’이란 공감대가 있었거든요. 나뭇잎 그려진 피케셔츠 서너 장보다 말 자수 새겨진 남방셔츠 한 장이 더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비싼 게 장땡’이란 생각이 바뀌기 시작한 건, 2000년대 후반부터입니다. 미생의 명함을 달자마자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졌죠. 뻔한 월급에 부모님께 손 벌리면서까지 백화점에 드나들 순 없었습니다.

가성비란 단어가 유행처럼 번지기 시작한 것도 이즘부터입니다. 먹고살기 팍팍해지자 사람들은 객관적 가격보다 주관적 가치를 따지기 시작했죠. 유니클로에는 늘 사람들이 북적였고, 더페이스샵과 이니스프리는 유커(중국인 관광객)에게까지 입소문이 났습니다.

10년도 채 안 된 소비자들의 ‘호갱(어수룩하여 이용하기 좋은 손님)’ 탈출 노력은 130년 전통의 명품 기업마저 휘청이게 했습니다. 명품 주얼리 기업 ‘티파니’ 아십니까? 예신(예비신부)들의 워너비 브랜드죠. 티파니는 다이아몬드 커팅부터 감정, 세팅까지 반지 제작 과정을 도맡아 합니다. GIA나 우신 등에서 다이아몬드를 감정받아 세팅만 해서 파는 다른 브랜드와 다르죠. 그래서 티파니의 가격은 매우 비쌉니다.

창업 때부터 가격 차별화 정책을 고수하던 티파니가 지난해 실적 부진을 겪었습니다. 주력 시장인 북미에서 ‘빨간불’이 켜졌기 때문입니다. 블랙 프라이데이가 한창이던 지난해 11~12월 매출이 오히려 5% 줄었다고 하네요. 달러 강세가 주요인으로 지목되고 있지만 ‘이 가격이 적당한가’란 사람들의 의심도 실적에 부담이 됐습니다.

그 자리를 대신한 건 덴마크 주얼리 기업 ‘판도라’입니다. 이색적인 아이템과 다양한 가격대를 선보이며 여심을 사로 잡았죠. 지난해 영업이익이 8억3800만 달러(약 1조180억원)나 됩니다. 전년보다 15% 늘었습니다. 어포더블 럭셔리(affordable luxury; 가격 경쟁력을 갖춘 명품)로서의 입지를 확실하게 구축한 셈이죠.

(출처=티파니ㆍ판도라ㆍ동부증권 리서치센터)
(출처=티파니ㆍ판도라ㆍ동부증권 리서치센터)

우리나라도 가성비 위력(?)이 서서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한해 1억8000만명이 찾는 ‘1000원숍’ 다이소는 지난해 매출 1조 클럽에 가입했습니다. 경기 침체에도 불구하고 편의점 업체들은 자체브랜드(PB) 호조에 힘입어 지난해 사상 최대 실적을 기록했죠. 1500원짜리 아메리카노를 파는 빽다방의 매장 수는 올해 700개(2014년 24개) 돌파를 바라보고 있고요. 기존 통신료보다 20~30% 요금이 저렴한 알뜰폰도 가입자가 600만명(1월 말 기준)을 넘어섰습니다.

이 같은 소비 트렌드 변화는 콧대 높던 호텔과 백화점도 무릎 꿇게 했습니다. 더 플라자 호텔의 일식당 ‘무라사키’는 최근 일본 가정식인 오반자이를 간소화해 점심 메뉴로 내놨습니다. 가격은 7만5000원인데요. 기존 도시락 메뉴 가격(12만원)의 절반 수준입니다. 적은 비용으로 사치를 누리려는 ‘스몰 럭셔리족’이 타깃입니다.

롯데호텔의 이탈리아 레스토랑 ‘페닌슐라’는 최근 4만9000원짜리 비즈니스 런치를 선보였고요. 쉐라톤 디큐브시티 호텔의 ‘피스트’(4만8000원)와 JW메리어트 호텔의 ‘만호’(A코스 7만5000원, B코스 6만5000원) 역시 런치 메뉴를 론칭했습니다.

백화점 역시 온라인 쇼핑몰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는 브랜드를 입점시키고 있습니다. “그래도 명색이 백화점 옷인데…. 동대문표가 싸움이 되겠어?”라고 생각하셨나요? 지난 2012년 온라인 쇼핑몰 최초로 백화점에 입점한 ‘스타일난다’가 지난해 롯데백화점 내 매출 1위에 올랐다고 합니다.

가성비의 힘이 느껴지시나요? 이름값이 대접받는 시대는 지났습니다. 이제 값어치가 대접받는 세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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