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3총선을 채 열흘도 남기지 않은 4일 오후. 전국 어디를 가더라도 지역 후보들의 유세가 소란스럽게 벌어지는 것이 당연한 때였다. 그러나 서울 금천구 가산디지털단지 중심가는 이상하리만치 적막했다. 수많은 인파가 거리를 오가고 있었지만 이들에게 자신을 알리는 정치인은 없었다. 인근의 구로디지털단지 회사 밀집지역으로 자리를 옮겨봐도 마찬가지였다. 흔한 선거 벽보조차도 눈에 잘 띄지 않아 선거 기간임을 실감하기 어려웠다.
인근 기업인들은 이날 오후의 풍경이 서울디지털산업단지(G밸리)를 대하는 지역 정치인들의 시각을 말해주는 모습이라고 말했다. 산업단지 내 근로자들이 지역 유권자가 아니어서 지역 정치인의 관심에서 멀어진 것이다. 입주업체 대표 A씨(47)는 “산업단지 근로자들이 유권자는 아니지만 사실상 지역경제를 떠받치는 것 아니냐”라며 “요즘처럼 어려운 때일수록 지역 정치인들이 더욱 관심을 기울여 줬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고 말했다.
◇구로공단서 IT·벤처단지로 탈바꿈… 지역경제 ‘효자 노릇’ = 서울디지털 산업단지는 일반인들에게 구로디지털단지, 가산디지털단지 등으로 더 알려졌다. 1964년 구로공단으로 출발한 이곳은 ‘대한민국 1호 산단’이라는 상징성이 있는 곳이다. 당시에는 국가전략 차원의 수출산업이었던 섬유, 봉제업 위주의 공업단지였다. 한때 국가 전체 수출액의 10% 이상을 차지할 만큼 성장하기도 했지만 1980년대 ‘오일쇼크’로 수출이 침체하고 노동운동의 확산으로 입주기업의 채산성이 악화하면서 침체를 맞았다.
산업단지가 다시 살아나기 시작한 것은 2000년쯤이었다. 정부는 경쟁력이 약해진 제조업 중심 산업단지를 IT·벤처 등 첨단산업 중심으로 개편하고, 이름도 서울디지털 산업단지로 개명했다. 금융상 혜택을 찾아 강남 테헤란로에 있던 벤처기업들이 대거 이전했다. 한국산업단지공단에 따르면 1990년대 말 712개사에 불과했던 입주기업 수는 2005년 5124개사로 5년 만에 7배가 넘게 증가했고, 2010년에는 입주기업 숫자가 1만개사를 돌파했다.
서울디지털 산업단지의 성공적인 변모는 지역경제에도 ‘효자’ 노릇을 했다. 구로동에서 20년 넘게 식당을 운영하는 장모(62)씨는 “원래 이 동네는 공장만 있던 칙칙했던 동네였는데 빌딩들이 많이 올라가면서 식당 손님도 많이 늘었다”고 말했다. 구로동에서 공인중개사 사무소를 운영하는 문모(55)씨도 “인근의 부동산과 상가 임대료가 많이 상승했다”고 말했다. 현재 금천구와 구로구의 지방세수 가운데 공단지역의 징수 비율은 매년 45~50%에 육박한다.
◇위기 맞은 산업단지 경기… 최근 3년 ‘휘청’ = 그러나 최근 서울디지털 산업단지는 전반적인 경기침체의 영향으로 휘청거리는 중이다. 2013년 1만1911개사였던 입주기업 수는 2014년 9790개사, 2015년 9726개사 등으로 쪼그라들었다. 돈으로 환산한 타격은 더욱 크다. 생산액은 2014년 17조510억원에서 2015년 12조8540억원대로 무려 5조원 이상 감소했고, 수출액도 2014년 39억3400만 달러(약 4조5241억원)에서 2015년 24억1000만 달러로 40% 가까이 급감했다. 지역경제를 떠받치던 고용인원은 같은 기간 16만2656명에서 15만9297명으로 줄었다.
이곳 산업단지 경기의 내림세는 우리나라의 전체적인 경기침체 수준보다도 감소 폭이 크다는 게 입주기업들의 설명이다. 배수진 서울디지털산업단지 경영자협의회 사무국장은 “IT·벤처 산업단지 특성상 설립된 지 오래되지 않고 종업원 수가 10~15명 내외인 영세사업장이 많다”며 “이런 기업들은 조금만 경기가 얼어붙어도 경영난과 자금난에 빠지기 쉽다”고 말했다.
◇입주기업인 “지역 국회의원이 ‘신발 속 돌멩이’ 빼줘야” = 입주기업인들은 누가 당선되든 산업단지의 숨통을 틔워줄 필요가 있다고 입을 모았다. 특히 이들은 이번에야말로 지역 정치인이 각종 규제정비와 인프라 개선 등 서울디지털산업단지 발전의 걸림돌이 돼 왔던 ‘신발 속 돌멩이’를 해소해 주기를 희망했다.
입주기업 B사 관계자는 지역 정치인이 해소해야 할 과제로 산업단지 내 임대규제를 꼽았다. 그는 “아파트형 공장을 분양받은 뒤 5년 이내에 임대하는 경우 면제받았던 취득세와 등록세를 몰수하도록 하는 규정이 있다”면서 “사업이 어려워지면 사무실 절반을 임대해 채산성을 개선하려고 해도 관련 규정이 이를 사실상 금지하고 있어서 어려움이 있다”고 말했다.
다른 입주기업의 대표 C씨는 “무엇보다 산업단지 인근의 교통체증이 심각한 수준이어서 기업들이 고질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다리 하나를 건너는 데 한 시간이 넘게 걸린 적도 있어서 직원들의 출퇴근은 물론이고 물류에도 차질이 빚어지는 일이 많다”면서 “지방자치단체 수준에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므로 정치인이 힘을 써야 한다”고 말했다.
산업단지에 입주를 희망하지만 규제에 발목을 잡힌 기업도 있었다. 중견 제약업체 D사 관계자는 “서울디지털산업단지 입주를 검토해봤으나 현행 산업단지 관련 법률에 업종제한이 걸려 있어 추진하지 못하고 있다”라며 “의약품과 관련한 창고규제가 많은 것도 걸림돌”이라고 지적했다.
이밖에 열악한 주거·문화시설 환경을 개선해 달라는 목소리도 있었다. 입주기업 E사 관계자는 “수십만 명이 운집해 있는 지역이지만 제대로 된 공원이나 극장이 없다”면서 “직원들이 회사 인근에서 거주하고 살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 준다면 인력 수급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